척박한 아스팔트 땅에서조차 뿌리를 곧추세우며 자기 터전을 지켜온 길섶의 풀꽃들이 마구잡이로 짓밟혀 훼손되고 있다. 사람의 발이나 건설중장비의 거센 바퀴에 밟힐까봐 숨죽이고 있는 풀과 꽃들의 절박한 명제는 ‘오늘도 살아남기’다.

무분별한 채취나 도로공사 등으로 한국 토종 식물들의 자생지가 파괴된다는 것은 한국의 비와 바람속에서 자라온 식물들의 고유한 유전자와 생물 다양성의 보고(寶庫)가 차츰 소멸된다는 뜻이다. 이런 유전자 중 일부는 미래에 불치병을 치유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 되거나 머지 않은 순간에 예측할 수 없는 가치를 발현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도로공사과정에서 많은 멸종 및 희귀 식물들이 눈길 한번 제대로 못받고 없어지거나 포클레인에 밀려 뭉그러지고 있다는데 우리의 절망과 아픔이 있다.

9일 충북 단양의 남한강이 감돌아 흐르는 강변 기슭. 산림청 희귀 멸종식물인 층층둥굴레가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이제 막 꽃을 피우고 있다. 경기 파주와 강원 영월 동강 주변 등에 소수의 개체만 분포하고 있는 층층둥굴레는 좁은 피침형 잎이 층층으로 서 있어 늘씬한 선비처럼 빼어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또 중간 중간 꽃을 피우는 독특한 속성을 지닌 다년생 풀꽃인 층층둥굴레는 217종의 산림청 멸종위기 식물 가운데 60번째인 큰두루미꽃에 이어 61번째 순서를 차지할 정도로 귀중한 식물이다.

우리나라 희귀·멸종위기 식물의 보전순위를 평가하기 위해 전국 분포 및 실태를 조사하고 있는 국립수목원 생물표본과 이병천 박사와 함께 단양지역 층층둥굴레 자생지를 찾아 몇 무더기의 군락들을 둘러보다 충격적인 장면을 발견했다. 강변에 밭을 만드느라 제초제를 마구잡이로 뿌려 멸종위기 식물로 지정된 층층둥굴레 서식면적이 큰 폭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일부 층층둥굴레 군락은 도로 인근 언덕쪽으로 애처롭게 밀려났다. 인근 도로 쪽에서도 열을 지어 풀 깎기를 하거나 제초제를 뿌려 많은 군락이 사라졌다.

무차별적인 제초제 공세로 도로 한쪽과 아래 밭쪽에서 협공을 받고 있는 층층둥굴레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주변 남한강에서 마을로 빠져나가는 샛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근처에 있던 대규모 층층둥굴레 군락은 수해복구공사를 하느라 파헤쳐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이 박사는 “이미 영월동강의 일부군락지가 도로공사로 파괴된데이어 단양쪽도 각종 공사등으로 개체 수가 현저하게 줄어 들었으며 이대로 방치할 경우 머지않아 북방계 식물인 층층둥굴레의 자생 남한계가 되는 이 곳 층층둥굴레 자생지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라며 생태계 원형 파괴를 우려했다. 그는 식물 불법 채취의 손길을 우려, 층층둥굴레가 파괴되고 있는 이 현장 위치를 비밀에 부쳐줄 것을 당부했고 지자체와 협의, 엄격한 관리대책을 마련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미 영월 동강 주변의 일부 층층둥굴레 군락은 군도 6호선 공사 와중에 사라졌다는 것이 이 박사의 지적이다. 이에 따라 길 주변에 방치돼있는 단양 층층둥굴레의 운명도 바람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김 박사와 함께 승용차로 정선을 지나 태백으로 향했다. 몇시간뒤 강원도 태백시 A산의 숲길을 따라 희귀식물 답사에 나섰다. 산길 주변 어디에나 미나리아재비, 나도양지꽃, 정선황기, 여우오줌, 쥐털이슬 등 수십종의 풀꽃들이 향연을 벌이고 있다. 길섶을 찬찬히 관찰하던 이 박사가 가리킨 곳에 있는 풀은 길이 2∼3㎝밖에 안되는 작은 잎과 그 한 복판에 하얀 꽃이 인상적이다.

잎에서 쓴 맛이 난다는 산림청 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 118호인 대성쓴풀의 위치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풀이 다소곳한 모습으로 자라고 있는 바로 턱밑까지 요란한 중장비 소리와 함께 도로 확장 등 개발의 물결이 밀어닥치고 있어 언제 사라질지 모를 위기를 맞고있다. 바로 길섶에 있는 이 풀은 길을 조금만 넓혀도 국내에서 완전 멸종된다.

중국 만주쪽에 일부 개체가 있지만 한반도에서 대성쓴풀이 멸종할 경우 종의 주권은 중국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인근 태백산의 법정보호종인 기생꽃 역시 비슷한 운명에 처해있었다. 높이 7∼25㎝되는 앵초과의 기생꽃은 하얀꽃의 눈부신 아름다움과 줄기 밑부분의 비늘같은 잎이 기묘하게 조화를 이룬 산림청 희귀식물이자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및 보호종이다.

최근 태백산 한 절 부근의 좁은 오솔길을 너비 2m도로로 확장하면서 깊은 숲길에 감춰있던 기생꽃 군락이 자취를 드러내 직접적인 불법 채취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동북아식물연구소 현진오 소장은 “기생꽃은 북방계 식물로 분포지가 고산 등에 고립돼 있어 식물분포학상 매우 중요한 식물인데 길이 넓어져 자칫 훼손될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쪽 기생꽃이 있는 지역의 길을 통제한 뒤 행인들이 다른 도로로 우회해 지나도록 하는 등 중앙정부차원의 적극적 보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동강할미꽃은 우리나라 동강에서만 볼 수 있는 꽃으로 98년 처음으로 발견돼 학계에 보고된 희귀식물이다.

현소장은 동강에서만 볼수 있는 희귀식물인 동강할미꽃도 처음으로 특산식물 신종으로 지정될 때의 위치인(기준 표준 채집지) 동강 광하교 인근 자생지가 최근 뿌리째 사라졌다고 한탄했다. 그는 도로공사나 제방공사 등을 할 때 그는 각종 공사현장등에 멸종위기 식물의 분포를 사전에 조사하기 위한 생태관련 감독담당자를 임명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희귀종도 무수히 많아 멸종위기종에 대한 전면적 재조사와 관리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최근 잇단 수해 복구 공사 등으로 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이 무더기로 사라지고 있지만 작은 공사 현장의 경우 중앙정부의 손길조차 닿지 않고 해당 지방자치단체도 소극적이다. 층층둥굴레가 서식하고 있는 한 지자체 담당자에게 관리실태를 물었으나 그는 이 희귀 식물이 자기 지역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 “그런 멸종 위기 종 관리는 국립공원관리공단쪽에서 담당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등 지자체의 멸종위기 관리체계가 허술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멸종위기에 처한 적지않은 식물이 희귀식물이나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는데다 전국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수해복구 공사와 제방공사 때문에 무더기로 군락지가 사라지고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차들이 무심코 다니는 국도변이나 산길, 하천 주변에 이름없이 피어있는 각종 풀꽃들. 그 가운데 엄청난 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적지않은 희귀 및 멸종위기종은 주민도, 때로는 식물 전문가들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없이 절멸의 길을 걷고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전국부차장 jinye@munhw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