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한국 김치를 대표하는 통배추 김치. 배추와 무를 주재료로 여러가지 향신채소류,조미제,젓갈 또는 어육류를 배합해 겨울을 거치면서 발효된다.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먹던 김치가 새록새록 감칠 맛이 난다. 김치로 일단 주제를 정하고 나니 공연히 김치 맛을 한번 더 음미해보게 된다. 그 뿐이다. 새로운 맛이 있을리 없다. 씹을 때마다 새로운 맛이 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맛의 오묘함 때문이리라. 붉게 물들어 있는 배추 조각을 한 입 베어물었을 때 침과 함께 입 안에 번지는 그 맛에 온몸의 감각이 깨어나고 흥건히 적셔지며 떨리기도 하는 과정을 느끼게 된다. 때로는 허무하기도 하다. 그 맛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입맛이 씁쓸하다. 김치 만큼 문화의 뿌리를 간직하고 있는 것도 없는데도 우리는 너무 에둘러왔고 또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자료를 구하기 위해 부리나케 김치박물관을 찾는다.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몰 지하 2층. 문을 들어서자 김치를 담가두었던 독이나 단지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게 보인다. 옹기는 배추와 고명과 젓갈이 융합하여 김치라는 새 생명을 잉태하는 하나의 자궁이다. 김치 맛의 비결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데 있다. 옹기에 김치를 담고 짚을 감아 땅에 묻어놓으면 김치가 오래도록 신선한 맛을 유지한다.

어떤 항아리에는 금줄이 둘러있고 흰 버선본이 매달려 있다. 원래는 장을 담은 독에 버선 코가 위로 가도록 거꾸로 붙이는 것인데 여기서는 바로 붙어있다. 잘못 재현한 것이다. 왜 독에는 버선코를 붙였던 것일까. 귀신이 들락거리면 장맛이 변한다고 해서 금줄을 둘렀으니 버선코를 붙인 것도 그런 의도이려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기층문화를 통해본 한국인의 상상체계라는 책에 실린 최인학 교수의 글을 보니까 반사되는 빛을 싫어하는 벌레들을 막기 위해 흰 버선본을 붙였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가 평소에 얕잡아 보던 전통 속에는 과학적 예지가 번뜩이는 것들이 많다. 김치도 그 중 하나이다.

김치박물관의 한 연구원에게 던진 첫 질문은 어떻게 고추와 배추가 만나게 됐냐는 것이었다. 그 연구원의 대답은 간단했다. 원래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운 것을 잘 먹었기 때문이란다. 고추는 임진왜란 때 일본을 거쳐 들어왔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멕시코에서 고추를 발견한 포르투칼 상인에 의해 전래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 고추는 최루탄과 같은 용도로 사용했었다. 그러다가 파나 마늘 등으로 매운 맛에 길들여진 조선에서는 일본과는 달리 고추를 일찍 식용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구원의 대답은 고추를 김치에 쓰게 된 계기가 뭔지 설명하기에는 미흡했다.

대원사에서 나온 책 김치를 보면 고춧가루로 김치를 물들이기 이전에는 자주색 갓이나 장독 가의 맨드라미, 잇꽃의 추출물로 붉게 물들였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는 고춧가루 사용이 김치에 물을 들이던 습속에서 비롯되었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충분히 가정해 볼 수 있는 대목인데 아니나 다를까 김치박물관 자료실에서 김치 관련 책자를 뒤적여보니까 그런 시각이 눈에 띈다. 이 보다는 과학적인 무게가 더 실린 주장도 없지 않았는데 그것은 먼저 박물관부터 둘러보고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전시는 고려 중엽의 책 동국이상국집과 조선 후기의 책 증보산림경제로부터 시작한다. 이 두 권은 김치 역사의 중요한 고비를 알려주고 있다. 앞의 것은 우리나라 문헌상에 김치가 최초로 등장하는 책이고, 뒤의 것은 처음으로 고추가 김치에 사용된 기록을 싣고 있다. 동국이상국집은 이규보가 쓴 것으로 장에 절인 순무 여름철에 먹기 좋고 소금에 절인 순무는 겨우내 찬이 되네는 시 구절이 나온다. 고려시대의 채소절임은 순무가 주재료이며, 여름에는 간장에 절인 장아찌로 겨울에는 양념을 하지 않고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짠지로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김장을 담그는 것은 양념을 하지 않고 소금에 절이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김치를 한자로 지(디히)라고 했고(후기에는 저를 씀), 김장을 염지라고 했다. 이 지는 전라도 일부 지방에서 그대로 김치를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고, 오이지 짠지라는 표준어 속에서도 살아있다. 또 이 시기에는 소금에 채소를 절여서 재운다고 해서 김치를 한자말로 침채라고 했다. 이 침채가 딤？·緞？되고 김치가 된 것이고, 김장이란 말도 한자어 침장에서 유래된 것이다.

옛책 다음에는 시대별로 먹던 김치 종류를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삼국시대 코너에는 가지 오이 파 순무를 소금에 절인 것도 있고 술지게미에 담근 것도 있다. 고려시대 코너에는 무와 배추를 얄팍하게 썰어 국물을 많이 해서 담그는 나박김치류와 짠무를 물에 희석해서 먹는 동치미 등이 처음 등장한다. 오늘날과 같은 통배추에 고춧가루를 버무려서 담그는 김치의 형태는 조선시대 코너에 와서야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추가 임진왜란 이후에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배추김치만은 아주 오래전부터 먹던 먹거리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배추가 들어온 것은 고추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물론 고려시대에도 배추는 있었다. 그 때는 배추와 무의 중간형태인 순무에 가까운 것으로 주로 약용으로 쓰였다. 생김새도 시금치와 비슷했다. 줄기가 희다고 해서 중국에서 백채라고 불리었고 그 말이 변해 배추가 된 것이다. 지금처럼 알이 밴 배추로 개량되어 수입된 것은 200년전 무렵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배추김치가 전국적으로 퍼진 것은 100년밖에 안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세계적으로 자랑하고 있는 먹거리인 배추김치의 역사가 아주 일천하다는게 믿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고추나 배추 같은 재료들이 고유 먹거리가 아니라는 것도 별로 반갑지 않은 사실일 것이다.(우리나라 고추나 배추는 다른 나라 것과 크게 다르긴 하지만.) 그러나 한국인에게 문화가 없다고?를 쓴 최준식 교수 같은 이는 외국 것을 들여와서 잘 변용시켜 세계적인 것으로 만든 바로 그 점이 한국인의 문화적 역량이 빛나는 부분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사실 채소를 절여서 보관하는 것은 세계 공통이라고 볼 수 있다. 서양의 피클이나 중국의 파오차이나 일본의 즈게모노나 김치나 채소절임이라는 조리원리는 똑같다. 그러나 김치는 여기에서 고추와 젓갈을 가미하여 한번 더 변용을 일으키면서 전혀 다른 제3의 채소절임으로 둔갑한다.

3000년전에 쓰여진 중국 최초의 시집 시경에는 오이를 깎아서 저를 담가 조상께 바치면 자손이 오래 살고 하늘의 복을 받는다는 시 구절이 있다. 여기서 나오는 저가 파오차이의 원조이다. 일본에는 매실을 절인 우메보시나 소금에 절인 무를 쌀겨에 묻어 발효시킨 다꾸앙(단무지)과 같은 즈게모노가 고대부터 오늘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고대에는 한중일 삼국의 김치가 비슷했던 것이다. 그런데 분식점에서 흔히 나오는 단무지가 일본 먹거리인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건너 간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것은 일본에서는 단무지를 조강지라고도 하는데 그 조강이 백제인으로 일본에 술 빚는 법을 전수해 준 실존인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현재는 피클이나 즈게모노나 파오차이는 먹어보면 신맛이 강해 김치 특유의 시원한 맛과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물론 김치도 발효가 되면서 유산균을 생성하고 유산균이 젖산균으로 바뀌면 신맛을 내지만 신맛을 내기전에는 젖산발효로 국물에 탄산이 녹아 최고의 시원한 맛을 낸다. 특히 김치는 고추와 젓갈이 들어가 모양도 완전히 바뀌었다. 왜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김치가 파격적인 변신을 하게 된 것일까? 박물관 자료실에서 본 김치, 한국인의 먹거리(주영하)라는 책이 어느 정도 궁금증을 풀어주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소금이 귀하게 되자 소금의 대용으로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 식품학자가 쥐 실험을 통해 고추의 매운 성분 캡사이신이 소금 섭취량을 줄여준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가설로 제기한 것이다. 고추가 살을 뺀다는 사실도 이 때 발표했다.

실제로 고추가 조선에 들어온지 200년이 지나 18세기에 이르면 소금 품귀 현상이 일어난다. 하나는 조선 후기에 유교의 저변확산으로 제사가 급증하자 제수용 생선을 절이는 소금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또 하나는 채소에 소금을 섞어 구황식품으로 먹곤 해서 기근 때마다 소금 수요가 부쩍 늘어난다. 19세기 전후에는 기근이 해마다 찾아온다. 그래서 솔잎이나 고들빼기 등으로 담근 김치를 곡물 대신 먹었기 때문에 김치조리 기술도 덩달아 발달한다. 조선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소금을 조금 넣어도 고추를 섞으면 미생물의 발육을 억제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이 때 젓갈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소금 품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과 같은 김치가 탄생한 것이다.

김치박물관에서는 김치의 역사 코너에 이어 김치를 만드는 과정과 함께 각종 김치를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김치의 종류는 200종이 넘는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박물관은 김치의 영양학 부분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면관계로 생략을 하고 신선한 채소를 원상태에 가깝게 저장한데다가 고추까지 곁들여 비타민C가 매우 풍부한 먹거리라는 사실만 지적해두고 박물관 탐방을 마치기로 한다.

김치가 이렇게 세계적으로 우수한 식품임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것은 세계 시장의 85%를 일본의 기무치가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기무치는 김치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기무치가 김치와 다른 것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일본 배추는 수분이 많아 신선도가 떨어져 절대로 한국의 김치 맛을 내지 못한다. 그런데도 기무치가 세계 시장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전통을 무시하고 제대로 국제화시키지 못한 결과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글·오병수/사진제공·디자인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