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양진당 솟을대문 사이로 사랑채가 보인다

집 속에 자연이 흐르는 한옥들

대청의 정결한 우물마루는 꼬장꼬장한 선비를 닮았고 내외 때문에 ㅁ자로 닫혀있는 안채는 조선여인의 삶이 떠올려진다. 그러나 대청에 올라 안산을 보거나 때로는 바라지창을 통해 흐르는 자연의 연상을 보지 못했다면 한옥을 다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집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 한옥의 창이나 대청에서 보이는 전망을 건축가에 의해 연출된 영상으로 이해한다면 이 낯설기 만한 은유가 마음에 탁 들 것이다.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은 달 사진을 텔레비전 모니터에 띄우고 제목을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 이라고 붙였다.

텔레비전이 없었을 때는 저녁에 달보기 말고 큰 낙이 없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담고 싶었던 진짜 메시지는 다른 데 있었을 것이다. 텔레비전이 달의 관객을 빼앗아간 기막힌 현실이거나 텔레비전이 달로 돌아 가야한다는 절박한 요구이거나.

하회마을의 한옥을 둘러보면서 사람들은 무엇으로부터 가장 강렬한 느낌을 받았을까. 개인마다 편차가 있겠지만 발길을 자주 멈추게 되는 것은 창이나 문이 열려 건너편 풍경이 성큼 눈에 들어올 때다. 창이나 문은 자연의 영상을 담은 텔레비전이다.

대청의 바라지창처럼 작은 것에서부터 사랑채 대청의 분합문을 모두 들어올렸을 때 보이는 탁 트인 전망에 이르기까지 모니터의 크기는 다양하다.

어느 나라에서나 집의 전망을 따지지만 특히 한옥은 사랑채에서 보이는 전망(안대)을 정한 다음에 집을 지을 정도로 중요시한다. 우리는 지난번에 부용대 정상에서 하회마을의 모든 집들이 휘돌아가는 강을 보고 원을 그리며 들어서 있는 것을 보았다.

하회마을 못지않게 옛 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경주 양동마을에서도 마을 주위의 산봉우리 가운데 하나를 안대로 정하고 집을 지었다. 안대를 중요시한 것은 좋은 경치가 그만큼 삶을 쾌적하게 하기 때문인데 단지 그 이유뿐이라면 안대의 의미는 평가 절하될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보다 근본적인 것, 옛사람들의 정신이 깃들어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한옥을 볼 때는 안에서 밖으로 봐야 잘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건물과 자연의 관계를 좀더 선명하게 보고자 한다면 병산서원을 들려보라고 권하고 싶다. 주위 경관을 어떻게 집 속으로 끌어들여 건축의 일부로 만들었는가를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에서 화산을 넘어가야 하는데 여유가 있으면 걸어서가도 되고 하루에 두 번 가는 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병산서원을 처음 봤을 때는 화회마을 강 건너에 있는 화천서원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강 가로 누각(만대루)이 있고 그 맞은편에 강당(입교당)이, 좌우로 기숙사(동서재)가 있어 링자로 배치되어 있는 게 그렇다.

물론 강당 뒤로는 서고(장판각)와 서애 류성룡의 위패를 모신 사당(존덕사) 등이 있어 규모는 훨씬 크다. 누각도 7칸으로 2칸이 더 긴데 건축사가들이 바로 이 건물을 문제삼고 있다. 이런 누각은 본디 독립건물이다. 부속 건물로 서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은 강의 경관을 최대한 건물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강당의 대청에 앉아 강쪽을 바라보자. 만대루 기둥 사이로 강이 흐르고 있다. 사각의 틀에 들어온 강물은 줌렌즈를 당긴 듯이 가까워지고 파나비전처럼 기둥을 건너 유유히 흐른다. 만약 이곳에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면 강의 경관은 차단되고 링자 공간은 꽉 막혀버렸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연은 건물의 일부로 편입되고 건물은 자연의 일부가 되어 조화를 얻게 된다. 안에서 밖을 보면 시야가 확 트인 반면 밖에서 보면 닫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한옥의 특징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 마을의 특징이기도 하다.

충효당(보물414호)은 집 앞에서면 다소 위압적이다. 솟을대문과 행랑채가 좌우로 길게 놓여 있기 때문이다. 서애 류성룡이 살았을 때는 이 만큼 호화스럽지는 않았다. 충효당은 서애가 죽은 뒤에 그를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높은 죽담 위에 지어진 사랑채가 보이고 왼쪽으로 링자형으로 안채가 붙어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나누어진 것은 내외 관념 때문이다. 한옥은 유교적 윤리에 따른 설치미술과도 같다. 유교에서는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맞는 것을 가장 중요한 집안 일로 꼽고 있다. 그래서 손님을 맞는 사랑채를 한껏 멋을 부려 짓고 사랑채 뒤로 돌아가면 사당이 있다. 사랑채 건넌방에 아들이 거처하는 것은 늘 아버지를 공경하라는 배려다.

서애의 형 겸암 류윤공이 살았던 양진당(보물306호)도 솟을대문을 지나면 바로 입암고택 (입암은 서애의 아버지 류중영의 아호)이란 현판을 달은 사랑채가 보인다. 그러나 양진당은 안채 앞쪽이 솟을대문이 있는 행랑채에 이어져 있고 사랑채는 링자 오른쪽 위에 붙어있는 꼴이다.

그래서 사랑채 지붕이 맞배와 합작으로 짝짝이인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충효당과는 달리 대청에 분합문을 달았고 정면에 쪽마루와 난간이 있다. 한옥은 똑같은 집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충효당 사랑채 대청에 올라서면 신선한 공기가 감돈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구조의 우물마루가 정갈하고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이 신성하기조차 하다. 대청은 뒷벽으로 두 개의 바라지창이 뚫려있어 병산서원의 만대루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막힌 곳과 터진 곳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공간의 중심에 대청이 있다. 대청에서 사랑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들어서 천정에 매달게 되어 있는 분합문이다. 분합문을 매달면 사랑방까지 터진 공간에 편입된다. 양진당 사랑채한옥은 안팎의 구분을 애매하게 함으로써 바깥세상을 향해 늘 열려있다. 집 속에 자연이 있고 자연 속에 집이 있다.

그러나 안채는 링자로 닫혀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사실 안채의 구조는 사방이 막혀있다. 경주 양동마을의 향단이란 집 안채는 가부장제에 짓눌린 중세여성들의 삶이 연상될 만큼 아주 폐쇄적이다. 어떤 건축사가는 안채가 더 으리으리한 경우가 많으며 야생동물의 침입을 막거나 프라이버시를 위해서도 그런 구조는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한옥의 열려있는 구조가 안채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충효당의 안채는 행랑채와 사랑채 사이의 일각문을 지나 중문을 통해 들어간다. 충효당 남쪽에 있는 류시주 가옥은 독채라서 안방 대청과 사랑방 사이에 내외담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충효당 북쪽에는 주일재라는 건물이 있는데 대문이 없기 때문인지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앞에 한칸도 안되는 내외담이 있다. 재미 있는 것은 안채에서 중문을 통해 보면 낮은 내외담 위로 나무와 산과 하늘이 보인다는 점이다.

특히 안채 중문 앞이 바자울로 되어 있는 양진당의 경우는 안채에서 바깥풍경을 볼 수 있고, 대청의 바라지창이라도 열면 뒤뜰이 보이고 시원하게 맞바람이 치게 되어 있다. 역시 안채도 안에서 밖을 볼때는 열린 구조임을 알 수 있다. 경상도 지방에서 유난한 안채의 폐쇄성은 이처럼 건물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충효당 안채에 들어서면 마당 가운데 장독대와 꽃밭이 있다. 정면에 안방과 대청이 있는 정침이 있고 왼쪽은 2층집으로 찬방과 고방에 이어 다락 밑에 반빗간 이라고 하는 문도 벽도 없는 부엌이 있다. 옛날 지방 호족들이 사병을 키울 때 필요했던 취사장 구조의 유습이라고 한다. 양진당은 이 반빗간 이 한칸쯤 더 크고 다락의 난간이 튀어나온 구조를 보이고 있다. 안채의 뒤뜰로 나가면 요즘에 다시 벽돌로 쌓은 굴뚝, 채마밭 등이 보인다.

하회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올려오다 보면 왼쪽 길가에 링자형이면서 사랑채 좌우가 날개를 단 듯 돌출한 하동고택이 있다. 좀 올라오다 오른쪽 고샅길로 들어서면 북촌댁 솟을대문이 보인다. 북촌댁은 행랑채 밖으로 창호가 나 있지 않아 매우 무뚝뚝해 보이는 집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정침 정면이 사랑채이고 가운데 중문이 있다. 북촌댁은 안채 살림에 비중을 두고 지어져 규모도 사랑채보다 크다. 중문에 열쇠가 잠겨있어서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하지만 북촌댁의 멋은 이밖에도 많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내루가 달린 별당채, 정침과 별당채의 어울림,맞배지붕의 사당, 기와편으로 무늬를 그린 꽃담, 초가지붕의 뒷간 등이다. 주일재 북쪽에 있는 남촌댁은 북촌대과 쌍벽을 이루는 집이었지만 몸채가 6.25 때 불타고 후원 별당과 사당만 남아 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마을 안에서 만송정 쪽으로 나가면 원지정사와 빈연정사를 볼 수 있고 강을 건너면 부용대 북쪽에 옥연정사와 남쪽에 겸암정사가 있다. 원지정사는 서애가 젊을 때 은거하던 곳이고 이 정자와 마주보고 있는 강 건너 옥연정사는 징비록 을 집필한 유석깊은 곳이다. 상대적으로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 질박하면서 고색창연한 멋을 느낄 수 있다.

빈연정사와 겸암정사는 서애의 형 겸암과 관련이 있다. 이처럼 하회마을의 집들은 겸암과 서애의 후손들간의 긴장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하회마을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서두에도 집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 이라고 말했지만 지금은 집에서 싱그러운 자연 그대로를 비추던 텔레비전을 볼 수는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창백한 브라운관에 매달려 가공된 현실을 통해 바깥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을 잃어버린 것은 집을 잃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글·사진/오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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