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차기 독일 총리 취임을 앞둔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 연합 대표가 지난 8일 베를린 연방의회에서 사회민주당과의 연립정부 구성 합의에 관한 발표를 한 뒤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 Leadership - 내달 차기 獨 총리에 취임하는 프리드리히 메르츠

메르켈에 밀려 입지 좁아졌지만
세번째 도전끝 2021년 당대표로

차기연정 주도하며 진보 손잡아
경제부양책 수용하고 안보 강화
국방비 무제한 늘릴 수 있게 돼

트럼프 리스크에 방위독립 깃발
佛·英과 안보 협력 논의하기도
獨, 유럽의 리더 역할 수행 이목

내달 차기 독일 총리에 취임할 것으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 연합 대표가 자신의 경제적 이념보다 국가 안보에 주력하면서 세계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재정 매파인 그가 부채 한도 규정을 면제하며 국방비를 무제한으로 늘릴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이 요구하는 경기 부양책을 수용하는 대화와 타협의 리더십을 발휘해 입법이 원활하게 이뤄진 덕분이다. 이는 안보를 이념과 정파를 초월하는 지고(至高)의 영역으로 본 메르츠 대표의 인식에 바탕을 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고립주의 속에 독일이 유럽에서 경제뿐 아니라 안보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메르켈 그늘에 가려진 메르츠…수차례 좌절에도 버틴 뚝심 = 메르츠 대표는 변호사 출신으로 1989년 중도우파인 기독민주당 소속으로 유럽의회 의원에 뽑혀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1994년 연방의회에 입성한 뒤 2000년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 연합 원내대표를 맡았다. 기독사회당은 기독민주당의 자매 정당이다. 메르츠 대표는 같은 당 소속인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와 라이벌 관계로 유명하다. 그는 환경·이민·복지 등 진보정당의 의제를 적극 수용한 메르켈 전 총리와 달리 복지 혜택 축소와 반이민을 주장할 만큼 당내 강경 보수파로 꼽혔다. 다만 이 둘은 유럽연합(EU)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를 중시하는 데는 생각이 일치했다.

메르츠 대표는 2002년 메르켈 전 총리에게 원내대표 자리를 내준 뒤 입지가 급격히 좁아지기 시작했고, 2004년 원내부대표 자리에서도 물러났다. 2009년 아예 정계를 떠나 다시 변호사로 복귀했고 자산운용사 블랙록 독일법인에서 이사회 의장까지 맡았다. 메르츠 대표는 2018년 메르켈 전 총리가 연임을 포기하고 정계를 은퇴하자, 곧바로 당 대표에 출마했다. 하지만 2018년·2021년 당대표 선거에서 메르켈 당시 총리가 지원한 아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워 전 대표와 아르민 라셰트 전 대표에게 번번이 밀리며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메르츠 대표는 결국 메르켈 전 총리가 정계를 떠난 2021년 12월 세 번째 도전 끝에 당 대표로 당선됐다. 메르츠 대표는 경제난과 반이민 정서를 적극 공략해 지난 2월 총선에서 올라프 숄츠 총리의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진보 연정을 꺾고 3년 만에 정권을 탈환했다.

이미지 크게보기 프리드리히 메르츠(뒷줄 왼쪽)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 연합 대표가 지난 18일 베를린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프란치스카 브랜트너(〃 오른쪽) 녹색당 공동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강경 보수파서 대화·타협의 지도자로 변신 = 강경 보수 이미지로 각인된 메르츠 대표는 차기 연정 협상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타협의 리더로 변모했다. 연방의회 단독 과반(316석, 전체 630석) 의석수를 얻는 데 실패함에 따라 사회민주당과 안정적으로 연정을 꾸리기 위해서다.

메르츠 대표는 숄츠 총리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선언한 ‘시대전환’을 계승했다. 시대전환은 자국군 현대화와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특별예산 1000억 유로(약 158조2510억 원)를 편성한 안보 강화책이다. 대러 강경파인 메르츠 대표는 국방비 무제한 증액안을 담은 시대전환 2.0 추진에도 나섰다. 이를 위해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이 각각 요구하는 인프라 투자와 기후변화 대응 관련 법안도 포함시키며 ‘법안 딜’을 성사시켰다. 방위비를 늘리려면 기본법(헌법)의 부채한도 규정을 바꿔야 하는데, 내달 25일 새 의회가 출범하면 헌법 개정(의석수 3분의 2 이상)이 어렵기 때문이다. 확대 재정과 군비 증강에 반대하는 좌파당과 AfD의 의석수 합계가 개헌 저지선인 재적 3분의 1을 넘는다. 메르츠 대표는 “만약 우리가 절대 다수표를 얻었다면 일을 다르게 했을 것”이라면서도 “우리는 연정 파트너와 함께 통치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것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국가 지도자는 대화와 타협으로 갈등을 조정하는 게 최고의 책무라는 뜻이다.

메르츠 대표의 시대전환 2.0은 사회민주당·녹색당의 동참 속에 순조롭게 상원 문턱을 넘었다. 지난 21일 독일 상원은 본회의에서 인프라·국방 투자를 위한 헌법 개정안을 표결에 부쳐 찬성 53표, 반대·기권 16표로 가결했다. 개정 기본법은 형식적 절차인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의 공포만 앞둔 만큼 사실상 확정된 상태다. 이에 따라 독일은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1％가 초과하면 부채한도 예외를 적용해 사실상 무제한으로 늘릴 수 있게 됐다. 독일에서 부채한도가 해제된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해당 제도가 도입된 이후 처음이다. 아울러 연간 신규 부채를 GDP의 최대 0.35％로 제한한 부채한도 규정과 무관하게 인프라 특별기금 5000억 유로를 조성할 수 있게 됐다. 이는 독일 전후 최대 규모 경기 부양책으로, 이 중 1000억 유로는 기후대응사업과 경제구조를 기후 친화적으로 바꾸는 데 사용한다. 독일의 DIW 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인프라 펀드만으로도 향후 10년 동안 경제 생산량을 매년 평균 2% 이상 늘릴 수 있다. DIW는 국방 및 인프라 지출 확대에 대한 합의로 2026년 성장률을 기존의 1.1%에서 2.1%로 높여 잡았다.

◇마크롱과 유럽 자강론 이끌어…유럽 새 리더십 구축 주목 = 긴축 재정을 고수했던 메르츠 대표의 입장 변화는 급변하는 지정학적 상황에 따른 것이다. 메르츠 대표는 러시아의 서진 위협 속에 나타난 트럼프발 안보 리스크에 자주국방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나토 탈퇴 가능성을 경고하는 등 미국을 방위에서 신뢰할 만한 파트너로 보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메르츠 대표는 “좋은 대서양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게 서로 이익에 부합한다고 미국인들을 설득하겠다”면서도 “최악의 시나리오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이 의존하는 미국의 핵우산이 제때 펴지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이다.

메르츠 대표는 프랑스·영국과 안보협력을 자국뿐 아니라 유럽 전체의 이익으로 판단하며 뚝심 행보를 하고 있다. 그는 총선 사흘 만인 지난달 26일 프랑스를 찾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유럽의 안보 독립을 논의했다. 메르츠 대표는 독일과 달리 핵무기를 보유한 영국·프랑스와 핵 공유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마크롱 대통령의 유럽 자강론에 동조하고 있다. 유럽에서 멀어지려는 미국의 핵우산을 믿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메르츠 대표는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이미 1960년대에 독일을 위해 이런 제안을 했다”며 “금기 없이 이 논의를 하는 것은 독일의 이익에도 그 어느 때보다 부합한다”고 말했다. 폴리티코는 독일과 영국,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유럽 핵 방위 체계를 논의할 경우 2차 대전 이후 가장 큰 유럽 방위 전략 변화가 될 것으로 분석했다.

메르츠 대표가 유럽의 방위독립 추진을 계기로 독일이 다시 유럽의 리더로 부상할지도 주목된다. 그간 숄츠 총리는 EU를 대표하던 메르켈 전 총리와 달리 사실상 존재감이 없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경기 부진과 함께 신호등 연정(사회민주당·자유민주당·녹색당)의 내분과 붕괴로 EU를 챙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2020년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이후 ‘유럽의 맏형’ 역할을 맡은 독일이 리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EU 내 균열이 더 심화됐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라파엘 로스 유럽외교협회(ECFR)의 라파엘 로스 연구원은 독일 도이체벨레에 “유럽 파트너들은 신호등 연정을 이끄는 숄츠 총리에 대해 국내 정치 수습에만 급급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반면 “메르츠는 숄츠보다 더 응집력 있는 양당 연정을 이끌며 독일 총리직을 맡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브뤼셀은 베를린의 보다 결단력 있는 리더십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현욱 기자 dlgus3002@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