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피터 터친 미국 코네티컷대 생태·진화생물학부 교수는 책을 통해 엘리트 과잉생산, 대중의 궁핍화, 국가 재정과 정당성의 약화, 지정학적 요인을 국가 붕괴의 구조적 요인으로 지목한다. 게티이미지뱅크

■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피터 터친 지음│유강은 옮김│생각의힘

사회피라미드 상층부 무거워져
한정된 자리 놓고 치열한 싸움
슈퍼리치까지 공적 자리 차지
권력 못잡은 고학력 불만 폭발

서민에 뽑아간 富, 부유층으로
전 세계서 ‘왜곡된 부의 펌프’
통치자, 만인 위하도록 제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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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탄핵 정국이 무한정 흐르면서 대한민국의 위상은 곤두박질쳤다. 국가의 경제적 상황과 정책 신뢰도를 의미하는 대외 신인도는 이미 바닥이다. 외국 기업들은 한국을 더 이상 매력적인 투자처로 보지 않는다. 맹방(盟邦)이라 추켜세우던 미국이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했는데도, 두 달여 그 사실도 몰랐던 정부는 이제 와서 “에너지부에 국한된 일” “큰일 아니다”라고만 둘러댄다. 피해는 대한민국이라는 시공간을 사는 국민의 몫일 수밖에 없다. 자영업자들의 폐업은 줄을 잇고,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한다. 정치가 곧 경제이자 외교이고, 나아가 국민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크게 웅변하는 사건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겠지만, 피터 터친 미국 코네티컷대 생태·진화생물학부 교수의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는 제목만으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책이다. 대런 애스모글루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가 신국부론이라 불리며 경제학적 시각에서 국가의 실패를 다뤘다면, 이 책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는 생태학과 인류학의 차원에서 국가의 붕괴를 조망한다.

역사상 숱한 국가가 명멸해 왔지만, 현대의 국가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현실 세계는 “국가 기관에 대한 신뢰 수준이 무너지고 공적 담론을 지배하는 사회규범”이 해체되는 과정, 즉 국가의 붕괴 단계에 들어섰다고 주장한다. 그는 “국가로 조직된 모든 사회는 결국 ‘종말’(End Times), 즉 고조된 사회적 격동과 정치적 폭력 그리고 때로는 붕괴의 시기로 접어드는” 현상을 반복하는 것을 일러 ‘역사동력학’(cliodynamics)이라고 명명한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부추기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사회 피라미드의 상층부가 너무 무거워지는”, 즉 엘리트 과잉생산을 지목한다. 고학력자는 늘어났지만, 자리는 한정적이었다. 권력의 상층부에 도달하면 부와 명예를 한 번에 쥘 수 있다. 당연히 “엘리트 지망자 게임”의 의자는 점점 줄어드는데, 참여자는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엘리트 내부의 경쟁은 불가피하고, 진입에 실패한 이들의 불만은 팽배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1980년대부터 늘어난 슈퍼리치들이 공적 자리를 탐한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를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엘리트는 과잉생산된 반면 대중은 ‘궁핍화’의 길을 걸었다. 고학력 계층의 임금은 증가했고 기대수명도 늘어났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임금은 지속적으로 감소했고, 사망률도 증가했다. 한마디로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사회적 불평등, 양극화로 치달았다. 저자는 “왜곡된 ‘부의 펌프’(wealth pump)가 나타나서 저소득층에게서 뽑아간 부를 부유층에게 주었다”면서, 이는 국가의 재정과 정당성이 약화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민주주의의 장식물을 걸친” 모든 국가가 국민을 위해 운영되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어렵게 권력을 잡은 그 자신들을 위해 복무하고, 나아가 “영향력 있는 이익집단”이 내세우는 의제에만 신속하게 반응함으로써, 오히려 “사회의 회복력”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복잡한 사회의 취약성”은 점증하고 있는데도, 대개의 엘리트와 국민은 “이제 막 자신들을 집어삼키려 하는 재앙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트럼프의 집권과 유럽의 보수화, 경제적 불평등에서 보듯 전 세계적인 “지정학적 지각변동”은 그 자체로 국가의 소멸 요인이다. 서구의 민주주의가 “계급에 기반한 정당 체계”에서 “다수의 엘리트 정당 체계”로 이행하면서 나타나는 폐해는 전 세계, 아니 지금 한국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으로, 국가의 쇠퇴를 가속화시킨다. 향후 어떤 기대도 가질 수 없다는 게 문제다. “기후변화와 팬데믹, 경제 불황, 국가 간 충돌, 대규모 이민 흐름” 등이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끌고 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류가 경험한 “과거의 숱한 대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사회들이 더 나은 사회적 조정을 이루기 위한 실험”을 멈추지 말 것을 요구한다. 책 말미 저자의 말이, 중차대한 결정을 앞둔 한국의 내일과 중첩된다. “우리의 통치자들에게 우리 공동의 이익을 증진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우리는 엘리트를 없애기를 원하지 않는다. 비결은 엘리트들이 만인을 위해 행동하도록 제약하는 것이다.” 424쪽, 2만3800원.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