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조 시장경제와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지난달 22일 자 이 코너에서, 한국을 ‘선원들은 두 패로 갈라져 한 패는 배야 어떻게 되든 선장을 끌어내릴 궁리나 하고, 다른 한 패는 태평한 선장만 쳐다보며 멍하게 앉아 있는’ 난파선 형국이라고 쓴 적이 있다. 선장이 어설픈 셀프 선상 반란을 시도하다 실패한 지금 이 난파선은 그야말로 표류 중이다. 더는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된 선장도 담화를 통해 이를 인정했다.

대통령이 2선으로 후퇴하겠다고 하자 즉각적인 직무정지를 요구하던 여당 대표는 8일 ‘탄핵’보다는 ‘질서 있는 퇴진’이 낫다며 총리와 국정을 공동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현 상황을 고려할 때 ‘질서 있는’ 퇴진의 필요성에 반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임기를 포함해 모든 것을 여당의 결정에 맡기겠다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를 근거로 여당 대표가 총리와 국정을 공동 관리한다는 것은 법률적 근거가 희박하다. 대통령이 국정 운영의 손을 놨다고 해서 여당이, 그것도 소수당인 정당이 국정 자체를 맡을 수는 없다. 총리의 경우 대통령을 대신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궐위와 사고 같은 상황이 아닌 한 어디까지나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위임한 사항에 대해서만 가능하다는 게 헌법학자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그렇다면 질서 있는 퇴진을 위해서는 결국 대통령이 나서서 그 로드맵을 밝혀야만 한다. 그러잖으면 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야당은 매주 대통령 탄핵안을 내놓겠다고 이미 밝혔다. 거리는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시위대와 그래도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로 메워질 것이다. 이 혼란스러운 모습은 국내는 물론이고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전파된다. 이미 소비와 투자는 줄어들고 있다. 외국 자본도 빠져나가는 중이다. 다행스럽게도 당장은 경상수지가 흑자지만, 국제 환경을 고려할 때 이대로 가면 적자로 전환되는 건 시간문제다.

물론 1997년의 외환위기와 같은 위기가 당장에 닥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위기는 우리가 설마 하는 사이에 도둑고양이처럼 다가온다. 27년 전에도 그랬다. 동남아의 통화위기가 현실화했지만, 한국의 경제 펀더멘털은 괜찮다고 거듭 말하고 있었다. 안이한 대응은 결국 파국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잘 참고했으면 외환위기를 피할 수도 있었을 1994년 멕시코 페소화 위기도 그렇게 발생했다. 그해 12월 1일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이 취임할 때만 해도 멕시코의 경제 전망은 온통 장밋빛이었다. 하지만 한 달도 안 돼 페소화 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지는 등 최악의 경제위기를 맞았다. 물론 직접적인 원인은 경제정책의 실패였지만, 시작은 치아파스주에서 발생한 반란, 유력 대통령 후보의 암살 등 정치 불안이었다.

일상이 유지되니까 괜찮을 것이란 안이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이미 외국의 투자자들은 비상계엄 소동이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옳았음을 증명했다는 얘기를 한다. 5100만 한국인이 ‘할부’로 정치적 혼란의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하는 점으로 미뤄 우리 경제가 일시에 무너질 것으로 생각지 않은 점는 다행이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정치발(發) 불확실성이 제거되지 않으면 언제 경제 쓰나미가 닥칠지 모른다. 대통령은 질서 있는 퇴진의 일정표를 내놔 정치적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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