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지난 추석 딸(왼쪽)은 외할아버지(오른쪽)에게 그동안 살아온 이력 정보를 상세히 묻고 기록함으로써 가족 모두를 기쁘게 했다.

■ 사랑합니다 - 나의 아버지(이영빈)와 딸(김리은)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본 뒤로 그 여운이 맴돌아 차에서 영화 OST를 계속 들었다. 어느 날 애니멀스(The Animals)의 ‘더 하우스 오브 더 라이징 선(The House of the Rising Sun)’이 흘러나오자 뒷좌석에 타고 있던 딸아이가 “아, 이거 외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노래”라고 했다. “이 곡이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노래인지 어떻게 알아?” 하고 물었더니 “응 지난 추석에 취재할 때 할아버지가 얘기해줘서 내가 유튜브로 찾아봤어”라고 말했다.

사정은 이랬다. 아이가 잠시 외국에 나갔다 온 터라 지난 추석 아버지와 딸아이는 1년 만에 만났다. 아버지가 살가운 스타일도 아니고 사춘기 무렵의 아이가 애교 부리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그냥 인사하고 밥 먹고 용돈 받고 오면 되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친정에 도착하기 전부터 아이가 “이번엔 할아버지한테 여러 가지를 좀 물어보려고 해”라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집에 도착해서 할머니에게 종이 하나 달라고 하더니만 삼촌이 쓰던 수첩을 받아오더니 할아버지 여기 앉아보시라고 한 다음 취재를 시작했다.

생년월일, 이름, 출신학교 등을 물었더니, 예전엔 ‘영빈’하면 다들 예식장, 중국집 이름이냐고 놀렸는데 원빈, 현빈이 나온 이후로는 세련된 이름으로 불리셨다는 우스개 답을 들려주셨다. 이어서 아이 수준에 맞는, 어쩌면 아이라서 물을 수 있는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 간식, 제일 친한 친구 이름과, 그 친구가 좋은 이유 등을 재잘거리며 물었다. 아마 그때 좋아하는 노래도 물었나 보다. 아이의 질문에 아버지도 마다하지 않고 조곤조곤 답을 하셨다.

어느덧 질문이 마무리되어가며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것’, ‘살면서 후회하는 것’을 물을 땐 멀리 부엌에서 나도 아버지의 대답을 귀 기울여 들었다.

아버지는 부산해양대를 졸업하고 기관사로 배를 타시다가 현대상선, SK해운 등 해운회사에서 일하셨는데 원래 꿈은 철도 기관사였고, 철도고 시험도 봤다가 떨어졌다는 얘기는 나도 처음 들었다. 여든을 넘긴 지금도 하고 싶은 것은 일인데 이제 나이가 많아 사람들이 일을 맡기지 않아 아쉽고, 취미나 일로는 양봉을 해보고 싶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할아버지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면서 의미 있는 시간을 마련해줘서 참 기특하고 고맙다고 말했더니 “가까운 가족인데 자주 못 보고 또 보면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만 하면 너무 아쉽잖아. 나도 오늘 할아버지한테 명언 하나를 들어서 좋았어. 삶에서 후회되는 게 있냐고 물었는데 욕심이 없으면 후회도 없다고 말씀하신 게 좀 와 닿았어”라고 말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분위기를 위해, 그리고 관계유지를 위해 어색하지만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 스몰토크도 해야 하고 의례적인 말들이 필요한 순간도 많다. 회사 내 어린 연차의 직원들은 이러한 상황을 어색해하고 그래도 그런 역할이 필요할 때는 내가 나서서 하는 편이었는데 어느 순간 나도 그런 말들을 이어가는 것이 불편하고 어색해졌다.

아이도 어색하고 쑥스러웠을 텐데 자기다운 호기심과 관심을 바탕으로 먼저 말을 건네고 그걸 또 또박또박 도식화해 정리해 메모해두고, 심지어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노래는 유튜브로 찾아보기까지 했다니 오히려 아버지에게 데면데면한 자식인 내가 할 일을 아이가 대신해준 것 같았다.

나는 누군가를 대할 때 그냥 피상적이고 형식적으로 대할 때가 많았는데, ‘어색하고 낯선 사람에게 저렇게 다가가 마음을 열 수 있구나’ ‘타인에게 말 걸기를 저렇게 할 수도 있구나’ 하는 걸 지난 추석 아이를 통해 배웠다.

앞으로 애니멀스의 ‘더 하우스 오브 더 라이징 선’이 흐르면 나는 영화 ‘퍼펙트 데이즈’보다 아버지를 더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 노래를 들으며 아이가 적어놓은 아버지에 대한 기록들, 그 나열된 삶의 흔적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수첩을 서랍 안에 잘 넣어두었다.

이미란 롯데문화재단 마케팅팀 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