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근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

당나라 태종(이세민)의 태평성세를 가져온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이창업 난수성(易創業 難守城)’이란 말이 나온다. ‘창업은 쉬우나, 수성은 어렵다’는 뜻을 가진 이 말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글로벌 기업을 세우는 것(創業)보다 시장 리더의 자리를 지키는 것(守城)이 더 어렵다는 뜻이다. 기술 발전 속도가 빨라 글로벌 1등 기업이 쉽게 몰락하는 정보기술(IT) 산업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글로벌 TV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했던 소니는 아날로그 TV가 디지털 디스플레이로 대체되는 시장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왕좌에서 밀려났다. 휴대전화 시장에서 14년간 세계 1위였던 노키아는 스마트폰 전환에 실패하며 시장에서 퇴출됐다. 지난 40년 이상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을 독점했던 인텔은 모바일 칩세트 시장을 놓치며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성공 기업의 딜레마’에서 IT 기술을 ‘파괴적 기술(Disruptive Technology)’이라 했다. 글로벌 1위 기업도 성공에 안주해 시장과 기술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올 3분기 영업이익이 9조1000억 원으로 시장 전망치를 15%나 밑돌자 경영진이 지난 8일 사과문을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PC와 스마트폰 메모리 시장에 안주하면서 2020년 전후에 열린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을 등한시했다. 그 결과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경쟁 기업인 SK하이닉스에 밀리고 있다. 이재용 회장이 심혈을 기울인 비메모리 사업 분야(파운드리 사업)에서는 이 회장이 사법 리스크에 시달리는 사이 글로벌 1위 업체 대만 TSMC와의 시장점유율 격차가 더 커졌다. AI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반도체 산업은 신기술 변화에 얼마나 빨리 적응하느냐가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삼성전자는 1993년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 업체로 등극한 이후 30년 넘게 시장의 리더 자리를 지켜 왔다. 1974년 파산 직전의 반도체 회사를 인수하던 당시 선진국과의 30년 기술 격차를 따라잡겠다는 도전 정신을 이제는 보기 어렵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과감한 투자보다는 안정적인 수익을 추구하는 문화로 바뀌면서 삼성의 ‘초일류’ ‘초격차’ 기술 우위가 점점 사라진다.

삼성이 내놓은 사과문에는 ‘기술의 근원적 경쟁력’과 ‘미래에 대한 준비 부족’, 그리고 ‘신뢰가 사라진 조직문화’와 같은 삼성전자 위기의 원인이 간명하게 잘 분석돼 있다. 문제는, 이 위기를 해결하며 ‘성공 기업의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는 리더십의 존재 여부다. 1993년 이건희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며 강도 높은 혁신을 주도한 것과 같은 리더십이 절실하다.

삼성전자는 올해 초 2027년까지 반도체 세계 1위 기업으로 복귀하겠다는 비전을 선언했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뿐 아니라, 새로운 주력 분야인 파운드리 사업에서도 선두 기업을 본격적으로 추격해 글로벌 1위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하면 삼성의 위기는 일개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경직적인 ‘주 52시간제’ 등 국회와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야 할 일도 많다. 삼성이 창업보다 어려운 수성에 성공해야 대한민국 경제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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