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1978년도쯤 외삼촌이 프랑스로 파견근무 나갈 때 공항에서 찍은 사진. 뒷줄 오른쪽부터 외할머니, 엄마, 외삼촌, 외숙모, 외숙모 친정어머니. 앞줄 세 명은 사촌들.

■ 그립습니다 - 나의 어머니 안형순(1932~2008) <상>

한 방송의 경연을 보다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자동으로 눈물이 줄줄 흐르던 날이었다. 반듯하고 건실한 이미지의 가수가 부르는 ‘엄마 꽃’이라는 노래를 듣던 순간이었다. 고생만 하시는 본인의 엄마를 생각하며 가사에 직접 참여했다는, 그런 소개가 이어졌다.

‘눈물이 나요. 눈물이 나요. 나 땜에 변한 것 같아….’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화면을 바라보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가사에 푹 빠져들고 있었다. 문득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엄마가 새삼 떠오르는 절절하고 애절한 가사였다. 밤새 이 생각 저 생각 뒤척이다 보니 지난 일들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유복하게 자란 우리 엄마는 인물 좋은 아버지 사진 한 장으로 덜컥 결혼을 결정하신 외할아버지 뜻에 따라 남편 얼굴도 못 본 채 시집을 오셨다고 한다. 외삼촌들은 최고 명문대 법대를 나온 것에 비해 부유한 환경에서도 딸이라는 이유로 공부를 맘껏 하지 못한 것이 늘 평생 한으로 남았다는 원망 섞인 노래를 부르셨다.

엄마는 정치, 경제, 체육계는 물론 선수 이름에 포지션까지 정확히 아셨고 심지어는 예능이나 연예 관련까지도 다방면으로 박식함을 보였다. 신문지상에 나오는 모든 면을 다 꿰뚫는 끝없는 대화에 아버지로부터 “네 엄마는 박사야, 박사”라는 핀잔인지 농담인지도 심심찮게 들었다. 엄마는 아빠가 생긴 순서대로 벼슬을 하자면 대통령에, 장관에 일등감이라고 말하곤 하셨다. 술을 너무나 좋아하는 아버지의 주정에 지칠 때면 “아이고, 웬수(원수) 같은 인간…”소리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자식들에게는 거친 욕이나 매 한번 드는 일 없이 늘 따뜻하고 자상한 엄마였다.

고생이란 걸 안 해 보고 자라서인지 대범한 성격 탓인지 살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가지 많은 나무에 어느 한순간도 바람 잘 날 없는 오 남매에게 늘 한결같은 사랑을 고루 나누어 주시던 분이었다.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던 셋째 딸이 서른 번쯤 맞선을 끝으로 서른을 넘기는 동시에 결혼했을 때 행복해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70대 초반, 한창 치매로 고생하실 땐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서로 떠넘기며 혹여 요양병원으로 보낼까 싶어 잠깐씩 제정신일 땐 “나 요양병원 절대 안 간다. 죽어도 내 집에서 죽을 거야”하시며 쓸쓸한 표정을 짓곤 하셨다. 치매 걸린 할머니 방을 어린 손주들이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을까 싶어 천 원짜리 20장을 봉투에 담아 넣어두었다. 누구라도 한 번씩 들여다보는 놈한테 천 원짜리 한 장씩 꺼내서 주라고…. 하지만 어쩌다 가 볼 때마다 확인한 베개 밑의 봉투는 항상 같은 금액이었고, 그 좋아하시던 TV도 멀리한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난데없이 “○○야, 학교 가야지”하며 소리를 지르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소풍 날 사라져 밤늦게까지 만화 가게에 처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도 꾸중 한마디 없이 손잡아 끌고 마중하셨다. 그날의 농땡이 충격 탓인지 치매기 이후, 한 번씩 학교 가라는 소리로 발작을 하며 발칵 뒤집곤 했었다.

본인이 많이 배우지 못한 탓에 학교를 안 가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줄 여기셨던 분. 제정신일 땐 농담처럼 그날 왜 학교 안 갔느냐 이따금씩 물어보곤 하셨는데 소풍 날 오죽하면 김밥을 못 싸줬을지를 헤아리지 못했던 철부지는 오랜 시간 입 꾹 닫고 있다가 나이 들어서야 툭 한마디 내뱉었다. “김밥 안 싸 줘서….” 퉁명스럽게 내뱉는 그 모습을 보며 서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가슴 속 가장 깊이 꽁꽁 숨겨둔 서러움의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숨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딸 조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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