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정범진 제36대 한국원자력학회 회장이 지난 13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진행한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윤석열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평가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언하고 있다. 정 회장은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두 자릿수대 신규 원전 건설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문호남 기자

■ 현안 인터뷰 - 취임 두 달 정범진 한국원자력학회장

‘탈원전 잘못됐다’ 선언한 게
尹정부 에너지정책 최대 성과
막상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
10차 전력계획에 신규원전 ‘0’

2050년 탄소중립 달성하려면
전력부문도 60% 무탄소 돼야
앞으로 원전 수요 어마어마해
에너지, 가격 고려해야 합리적

원전 10기 수출 목표달성위해
범부처 나서 한수원 지원해야


인터뷰 = 박수진 경제부 차장 sujininvan@munhwa.com

문재인 정부 ‘탈(脫)원전’ 정책으로 5년간 암흑기를 겪던 국내 원전 산업은 지난해 출범한 윤석열 정부의 ‘탈원전 폐지·원전 활성화 정책’에 힘입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전임 정부에서 중단됐던 신한울 3·4호기 건설이 재개됐고, 고리 2호기를 비롯한 수명 만료 예정 원전 10기의 계속운전도 추진 중이다. 일감 공급, 융자·세제 혜택 등으로 중소 원전 기업을 중심으로 한 생태계 복원이 속도를 내고 있고, 수출도 비교적 순항하고 있다. 지난해 3조 원대 이집트 엘다바 원전 건설 사업권을 따낸 데 이어 1조 원대 루마니아 원전 설비 개선 사업 수주도 유력하다. 폴란드 민간 발전사와 2∼4기 신규 원전 건설을 고려한 협력의향서(LOI)를 체결했고 체코 두코바니 원전 수주전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원전으로의 복귀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정책은 아니다. 탄소중립 달성 압박,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무력 충돌에 따른 에너지 안보 위기로 ‘원전 역할론’이 급부상하면서 전 세계 주요국들은 원전 확대로 선회하고 있다. 1969년에 설립돼 원자력 분야 국내 최고 권위의 단체로 꼽히는 한국원자력학회 행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원전으로의 ‘유턴’ 움직임이 거센 가운데 국내 원전 생태계 정상화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지난 9월 취임한 정범진(58) 신임 한국원자력학회 회장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지난 13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만난 정 회장은 인터뷰 시작부터 “관료가 바뀌지 않고 있다”며 “아직 푼 문제가 없어서 A인지 B인지 C인지 D인지 F인지 정책 평가 점수를 매길 수조차 없다”고 쓴소리를 내놨다. 그는 “탄소중립이라는 도전적 요소를 고려한다면 신규 원전은 두 자릿수대로 지어야 한다”며 “에너지 믹스는 이념이나 협상의 산물이 아니며 가장 중요한 가격을 고려치 않는 것은 전기요금에 대한 제어 기능을 포기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평가한다면.

“‘탈원전 정책이 잘못됐다’고 선언한 게 가장 큰 성과다. 문제는 그랬으면 달라져야 하는데 막상 달라진 게 없다는 거다.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향후 15년의 중장기 전력 수요 예측치와 전력설비·전원구성 설계 방향을 담은 계획으로 10차 계획의 경우 2022∼2036년 계획)에만 해도 신규 원전이 포함되지 않았다. 대통령은 원전 비중을 30% 이상 가져가겠다고 했지만 원전을 늘린 게 아니라 모수인 필요 전력량을 줄였다. 관료 사회의 관성이 크기 때문으로 보인다. 탈원전을 추진하던 공무원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료가 영혼 없이 정책을 추진한다고 하는데 마치 영혼이 있는 것처럼 변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인적 청산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제11차 계획에는 신규 원전을 넣겠다고 했지만 이것도 뚜껑을 열어봐야 한다. 충분한 정도의 신규 원전을 넣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사용후핵연료 관련 법안(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를 위한 특별법안)도 마찬가지다. 내용 자체가 잘 만들어져야 하는데 실적 쌓기용으로 법안 통과에만 방점을 두고 있다. 백년대계를 세운다는 생각보다는 현 정권이 필요한 만큼만 하자는 게 산업통상자원부의 접근 방식인 듯하다. 한국전력공사 적자만 해도 그렇다. 제대로 된 만회 대책이 없다. 적자 원인이 재생에너지는 늘고 원전은 줄어든 데 있는데, 긴축 경영이라는 답이 아닌 답을 내놓고 있다.”

―원전을 얼마나 늘려야 하나. 주민 수용성과 부지 확보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하니 무작정 확대할 수는 없지 않나.

“탄소중립이라는 새로운 도전적 요소를 고려한다면 신규 원전을 두 자릿수로는 지어야 한다.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수립할 때 경제 성장률 등을 고려해 전력 수요를 예측한다. 지금까지는 탄소중립을 위해 필요한 수요를 별도로 잡지 않았다. 8∼10차 계획까지만 해도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만 전력 수요를 예측했고, 전기자동차·수소 생산·인덕션으로 인한 수요를 반영한 게 전부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려면 전력 부문도 60%가 무탄소로 바뀌어야 하고 화석연료도 전기화·수송화하려면 원전 수요가 어마어마하다. 그런데도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있다. 원전 부지 확보도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마련이 가능하다. 문재인 정부 때 추진이 백지화됐던 천지·대진 원전 부지도 있고, 고리 쪽에도 부지가 있다. 주민 수용성과 관련해 울진과 기장 주민들은 원전 건설에 긍정적이다. 기존 대형 원전 외에도 GS에너지가 경북 울진에 소형모듈원전(SMR)을 짓겠다는 구상인데 아시아 지역 최초의 SMR이 될 가능성이 있다.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는 SMR에 대한 계획도 포함해야 한다. 그래야 수출 길이 열릴 수 있다.”

―SMR과 기존 대형 원전과의 균형은 어떻게 가져가야 하나.

“별개의 시장이다. SMR은 규모가 대형 원전의 10분의 1, 20분의 1 수준이기 때문에 대체품이 아니다. 열과 수소 생산, 지역난방, 화력발전소 대체, 선박의 추진체 등이 가능한 별도의 시장이다. 대형 원전을 지을 수 있는 나라는 대형 원전을 지어야 한다.”

―재생에너지·석탄·LNG 등 다른 에너지원에 대한 정책 추진 방향은.

“이념이 아니라 합리적 근거에 기반해 추진해야 한다. 원전, 재생에너지, 석탄, LNG 등 에너지 믹스는 부하지속곡선(Load Duration Curve)과 발전원별 가격곡선(Screening Curve)을 겹치면 수치상 딱 나오게 돼 있다. 이 공식에 맞게 가면 그게 가장 합리적이다. 협상의 산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석탄도 0으로 하는 건 정답이 아니다. 전력망의 주파수 조절 기능이 있다. 퇴출되면 대신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 없다. 값이 싼 만큼 의미가 있다. 다만, LNG는 많이 줄여야 한다고 본다. 가격 변동이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재생에너지도 무조건 나쁘다고만 볼 건 아니다. 다만, 합리적 수준으로 개선돼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가격이다. 가격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기 값에 대한 제어 기능을 포기한 것과 다름없다. 합리적인 게 별 게 아니다. 가격을 고려하는 게 합리적인 것이다. 가격도 생각 않고 ‘내 임기 중 가격 안 올린다’고 했다가 지금 문제로 나타나고 있지 않나. 원전도 앞으로 가스, 석탄이 줄어들면서 역할이 증대될 때를 대비해 탄력 운전을 해야 한다.”

―난제로 남아 있는 한전 적자·한국가스공사 미수금은 기관 긴축 경영이 답이 아니라면 어떻게 풀어야 하나.

“원칙에서 벗어나면 문제가 생긴다. 에너지 수급은 안정적 공급과 사회적 비용 최소화를 원칙으로 에너지원 다변화를 추구해 왔다. 그런데 이 원칙에 역행했기 때문에 현재 에너지 믹스에 문제가 생겼다. 가격이 올라서라고 변명만 하면 안 된다. 다변화로 여러 가지를 갖고 있다가 가격이 오르면 싼 쪽으로 전환해서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비용도 최소화해야 한다. 이 같은 정책 수립의 A, B, C 자체를 무시하고 원전은 너무 줄이고 LNG는 너무 키운 게 지난 정권이다. 그리고 당시 적극적으로 따랐던 게 산업부다. 그런데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이 당사자가 승진하는 상황이다.”

―원전 수출 10기 목표는 달성 가능하다고 보나.

“외교부 등 정부가 직접 나서야 할 상황인데 한국수력원자력에 맡겨만 두고 나서지 않고 있다. 한수원이 해결하지 못하는 과제를 범정부적으로 나서서 도와주는 구조가 돼야 한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게 지금 눈앞에 보이는 폴란드, 체코,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사업에만 신경 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탄소중립을 위해 건설돼야 하는 신규 원전 규모는 160∼200기까지 된다. 미국 웨스팅하우스, 프랑스 전력공사가 다 수용할 수 없다. 결국 그 물량을 소화하기 위해 전 세계 모든 유틸리티가 매달려야 한다. 첫 몇 기 수주를 위해 서로 척지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런 면에서 (한전, 한수원에 소송을 건) 웨스팅하우스의 태도는 소탐대실이다. 오히려 향후 협력을 위해 친구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앞서 언급됐던 사용후핵연료 처리가 발등의 불인데 법안 처리부터 시작해 진행이 지지부진하다.

“처분장이 원전 자체보다 위험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작동하는) 무빙 파트가 없지 않나. 그런데도 이 같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가 어렵다는 건 과학적으로는 이상한 일이다. 결국 사회적 이슈라는 의미다. 원자력계가 관심을 갖지 않은 측면도 있다. 일단 수조에 보관하면 되니 반핵 활동가들의 선동에 제대로 대응을 안 한 것도 있다. 이제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기술적으로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할 때다. 사용후핵연료 처분장 처분 용기만 하더라도 너무 안전성만 강조하다 보니 지나치게 가격이 올라간다. 지하 500m에 들어가면 금속 통에만 넣어도 지하수 이동이 별로 없어 부식이 잘 안 된다. 원자력계가 다시 전략을 수립하고 국민 설득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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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범진 학회장은

회원 6000명 가입한 학회의 수장… 방송서 “日오염수 걱정없다” 조목조목 설명

지난 6월 정범진 한국원자력학회장이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 신분으로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일본 후쿠시마(福島) 오염처리수 방류가 걱정된다”고 말한 사회자를 과학적 사실에 근거해 조목조목 반박하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정 회장은 강연, 방송 출연, 언론 기고 등을 통해 원자력을 비롯한 에너지 현안을 국민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탈(脫)원전 등 정부 정책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전문가로 유명하다. 정 회장을 인터뷰한 지난 13일에도 그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된 ‘원자력에 대한 국민 수용성 증진 및 지지기반 구축 세미나’에 토론자로 참석하고 있었다.

정 회장은 “옳고 그름에 민감한 성향이라 잘못돼 보이는 것을 그냥 두고 넘어가기가 어렵다”며 “환경 운동을 하다 돌아선 그린피스 창립자 제임스 러브록 같은 분들의 글을 읽으면서 환경 운동이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구나 깨달았고,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거짓말이 난무한 것을 보고 분노해 국민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원자핵공학을 전공하게 됐다는 정 회장은 “학교 다닐 때는 전공에 약간 후회가 있었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 적성에 맞는 부분이 많았다”며 “특히 박사학위 받고 바로 원자력 사무관으로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단기에 원전 전체를 들여다보며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원자력학회장으로서의 목표에 대해 “학회는 실질적으로 집행하는 능력이 있는 기구는 아니지만, 구성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하고 공유하면서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임무를 담당해야 한다”며 “탈원전 정책으로 붕괴된 시스템 중에는 파악된 것도 있지만 안 된 것도 있는 만큼 이를 복구할 수 있도록, 또 왜 탈원전 정책이 시행됐는지 성찰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그는 “탈원전 시기에는 원자력 밖에서 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내부에서 소리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며 “우리 원자력이 어떻게 가고 있는지, 국내적인 상황과 세계적인 상황에 어떻게 맞춰가야 하는지, 원자력계 내부의 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원자력학회는 회원 수가 6000명에 육박할 만큼 큰 학회고 산업체 등 기업 회원도 많이 보유한 데다 우리 학회의 학술지인 NET(Nuclear Engineering and Technology)는 원자력 부문 세계 5위의 학술지가 됐다”며 “학술 대회 수준을 보다 높이며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가 아닌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갈 준비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범진(58)

△한성고 △서울대 원자핵공학 학·석·박사 △과학기술부 원자력 사무관 △영국 맨체스터대 연구원 △한국연구재단 국책연구본부 원자력단 단장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 △산업통상자원부 전력정책심의회 위원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위원회 위원 △한국원자력학회 부회장 △제36대 한국원자력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