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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장재선 선임기자의 예술 순례

뾰족한 첨탑 대신 주변 산세와 조화… 서구 추종 벗어난 한국적 성미술

장재선 전임 기자
장재선 전임 기자
  • 입력 2023-06-02 09:09
  • 수정 2023-06-02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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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이미지 크게보기 서울 혜화동성당 전경을 아래서 찍었을 때의 모습. 7개의 기둥에 받쳐진 대형 부조 벽화는 ‘최후의 심판도’이며, 첨탑의 부조는 이 성당의 수호성인 베네딕도 상이다. 장재선 선임기자



■ 장재선 선임기자의 예술 순례
(12) 근현대 미술 거장들 작품 모인 서울 혜화동성당

1927년 건립 서울 세번째 성전
유럽 평지에 많은 고딕양식 탈피
7개 기둥이 받친 신전모양 탄생

광화문 이순신상 작가 등 참여한
대형 부조벽화 ‘최후 심판도’ 등
새로운 조형미로 신심 깊이 새겨

김대건 신부 중앙 배치한 성인화
주체성 회복 노력 큰 결실 평가
마당 성모상도 한국인 얼굴 담겨



글·사진 =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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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1915∼1982), 문학진(1924∼2019), 김세중(1928∼1986), 권순형(1929∼2017), 이남규(1931∼1993), 최종태(91), 이종상(85).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거장들이다. 이들 작품이 한곳에 있다고 하면, 미술관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그곳은 다름 아닌 서울 혜화동성당이다.

낙산 자락에 있는 이 성당은 1927년 서울에서 가톨릭 성전으로 명동성당, 중림동성당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졌다. 1909년부터 이곳에 있던 베네딕도 수도원이 원산 덕원으로 이사 가자 수도원 목공소를 개조해 지었다. 1955년부터 5년간 신축 공사를 해 지금과 같은 모습의 성당을 완성했다. 당시 신도로 있던 장발(1901∼2001) 서울대 미대 학장이 신축 작업 전반을 이끌었다고 한다.

photo이미지 크게보기 1950년대에 혜화동성당 부조 벽화 작업을 함께 진행했던 작가들. 왼쪽부터 최만린, 장발, 김세중, 송영수. 최태만 국민대교수 논문집



장 학장은 이 성당의 성미술(聖美術) 작업에 미대 제자들을 참여시켰는데, 자신의 이름으로 된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다. 한국 근현대미술의 선구자로서 서울대 미대를 창설하고 후학들의 벗바리 역할을 했던 장 학장의 인품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제2공화국 수반이었던 장면(1899∼1966) 전 총리의 동생인 장 학장은 20대에 명동성당 12사도화를 그렸던 성미술 거장이었다. 그럼에도 혜화동성당 작업에서는 한 발 뒤로 물러서 제자들을 앞세운 것이다.

혜화동성당은 한국 성미술 역사에서 특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한국인 정서에 맞는 토착화 미술의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우선 설계를 맡은 이희태(1925∼1981) 건축가는 우리나라 지형에 어울리는 모양을 지향했다. 서구 고딕 양식은 유럽처럼 평지가 많은 곳에 맞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 한국의 산세와 조화를 이루는 건축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로 7개의 둥근 기둥이 받친 신전 모양의 성당이 탄생했다. 대형 부조 벽화 아래로 25개의 화강암 계단을 올라가야 입구로 들어설 수 있다.

기존의 뾰족한 첨탑 양식 성당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새 성전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성당이 과연 이래도 되나, 게정대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후 전국에 다양한 형태의 성전들이 들어서며 그 목소리는 잦아들었고, 우리 정서에 맞게 토착화한 건축 효시로 인정받게 됐다.

이 성당은 1990년대에 마당 대부분을 시의 도로 확장에 내놨다. 그 때문에 성(聖)과 속(俗)의 중간 지대가 없어져 고즈넉한 분위기가 사라졌다. 그 아쉬움을 달래주는 것은 역시 성당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성미술 걸작들이다.

계단 위의 대형 부조 벽화는 ‘최후 심판도’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른손을 치켜든 모습 옆에 네 복음서(마르코, 요한, 마태오, 루가복음)를 상징하는 사자, 독수리, 천사, 황소를 새겨놨다. 부조의 선과 면이 굵고 단순해서 강렬한 느낌을 준다. 장발의 주도로 김세중이 원도(原圖) 만들고, 송영수(1930∼1970)와 최만린(1935∼2020)이 협력해 흙으로 빚었다. 그 후 김세중과 장기은(1922∼1961) 작가가 조각했다.

장발의 제자였던 김세중은 광화문광장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 작가로 유명하다. 아내인 김남조(95) 시인과 함께 가톨릭 신도였던 그는 이 성당의 여러 곳에 작품을 통해 신심을 새겼다. 성베네딕도상(화강석), 제대(대리석), 십자고상(화강석)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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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 아래쪽 왼편 벽감에 있는 성모자상(시멘트)도 그의 작품이다. 이 성당의 세 묘원(墓園) 중 하나인 경기 포천 묘원의 장면 전 총리 묘역에 설치돼 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지형 변화 등의 이유로 방치돼 있던 것을 2017년에 홍기범 당시 주임신부가 발굴해 본당에 모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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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안에 들어서면, 예수 부활상이 얹혀 있는 성수대(聖水臺·아래 작은 사진)를 바로 만나게 된다. 5만 원권 화폐의 신사임당 영정을 그린 이종상 작가가 암적색 화강석 좌대를 디자인하고 제작했다. 그 위에 임영선(64) 작가의 부활상(황동)이 자리했다. 부활한 그리스도 상반신을 상하로 가늘게 과장한 성상은 못 자국이 있는 두 손을 크게 강조했다. 신도들이 자기 손을 하도 많이 얹어서 못 자국이 닳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앞에 서면 하릴없이 손을 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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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진의 ‘103위 순교성인화’, 권순형의 도자벽화, 김종영의 성수반(聖水盤), 이남규의 유리화 등도 매혹적인 작품들이다. 제작 과정의 일화들이 모두 흥미로운데, 특히 ‘103위 순교성인화’는 그 사연을 작품 옆에 써놨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김대건 신부와 외국인 신부 자리를 바꿔놓게 된 이유다. 문학진 작가는 명동성당의 ‘79위 복자 성화도’를 참고했는데, 대부인 박갑성 당시 서강대 교수가 “외국인이 중앙에 있으면 주체성이 부족해 보인다”고 한 것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중앙의 외국인 자리와 김 신부 자리를 서로 바꾼 것이다.

photo이미지 크게보기 문학진 화백의 ‘103위 순교 성인화’는 김대건 신부를 외국인 신부보다 더 중앙에 배치함으로써 한국 성미술의 주체성을 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에 대해 혜화동성당 도록은 “쿠데타라고 표현될 정도로 큰 사건이었고, 성미술에서 주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한 하나의 큰 결실이었다”고 기록했다. ‘주체’라는 말이 북쪽 정치체제 탓에 오염돼버렸으나, 그 체제에 의해 탄압받았던 가톨릭의 작가들에 의해 남쪽의 한 성당에서 성스럽게 되살아난 셈이다. 그러고 보면, 이 성당 마당에 있는 최종태 작가의 성모상과 요셉상도 ‘주체적’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행방 묘연 ‘韓 성모·순교 복자’바티칸 서고서 발견 ‘감격 귀환’

이순신 영정 그린 장우성 비화
타계 직전 김수환 추기경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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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이미지 크게보기 김수환 추기경이 지난 2004년 장우성 화백에게 세례를 주고 있다. 위는 장 화백이 30대에 한국화풍으로 그렸던 성화. 이천시립월전미술관·가톨릭신문



서울 혜화동성당 뒤쪽에 자리한 가톨릭대 성신교정엔 주교관이 있다. 한국의 역대 추기경들이 퇴임 후 머무르는 곳인데, 성미술과 관련한 숨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대한민국 표준영정 제1호 충무공 이순신 영정을 그린 월전(月田) 장우성(1912∼2005) 화백의 작품에 관한 것이다.

장 화백은 1949년 바티칸 국제 성미술전에 한국 대표로 ‘한국의 성모와 순교 복자’ 3부작을 출품했다. 한복을 입은 성모와 성인상을 한국화풍으로 그린 것이었다. 작가는 30대에 제작한 이 그림에 애정이 깊었으나, 작품이 로마 교황청에 간 후로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다. 1991년 자신의 화집에 넣고 싶어 바티칸까지 갔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바티칸 고문서 서고에서 일하던 한국인 사서가 우연히 발견했고, 최승룡 당시 한국교회사연구소장이 국내에 들여와 주교관에서 처음 공개했다. 장 화백은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옛 애인을 만난 것 같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이때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후 주교관에 머무르고 있던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이 그 감격을 함께했다.

장 화백은 성화 3부작뿐만 아니라 성미술 작품을 여러 점 제작했으나 가톨릭 신도는 아니었다. 서울대 미대 교수 동료였던 장발 작가 등이 영세를 받으라고 권유해도 계속 미뤘다고 한다. 그러다가 타계 전해인 2004년 신도인 딸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영세를 희망했다. 당시 서울대교구 성미술 감독이었던 정웅모 신부가 장 화백 자택을 방문해 예비자 교리를 3번 받게 했다. 장 화백의 거동이 불편해 외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은 김 추기경이 장 화백 집으로 직접 찾아가 세례 성사를 집전했다. 영세 현장에 함께 했던 정 신부는 “장 화백이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예술가는 아름다움의 추구를 통해 진선미의 원천인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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