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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나윤석 기자의 고전을 묻다

“사랑은 운명이라고?… 끝없이 연마해야 하는 기술”

나윤석 기자
나윤석 기자
  • 입력 2023-04-18 08:57
  • 수정 2023-04-18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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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이미지 크게보기 박찬국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지난 14일 서울 동작구의 한 카페 앞에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백동현 기자



■ 나윤석 기자의 고전을 묻다 - 박찬국 서울대 교수가 꼽은 ‘사랑의 기술’

“설렘 후 찾아오는 실망과 환멸
성숙한 인격·신뢰로 극복해야

상대 소유하려는 건 자기도취
합일되지만 개성은 존중할 것

물질·명성에 매몰 경계하고
자식·연인 나아가 이웃까지
‘사해동포적 사랑’으로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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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후 종교·철학 분야에서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읽힌 고전이다.”

박찬국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독일 철학자 에리히 프롬(1900∼1980)이 1956년 발표한 명저 ‘사랑의 기술’(원제 ‘The Art of Loving’·문예출판사)을 이렇게 소개했다. 전 세계에서 2500만 부 이상 팔린 고전은 위대하지만 때로 갈등과 다툼의 원인이 되는 사랑의 다양한 무늬를 사유한다. 책에 대한 전 세계적 열광은 엄청난 환희와 함께 불타올랐다가 이내 환멸과 적대로 사그라들곤 하는 사랑이 인류의 영원한 숙제임을 증명하고 있다. 지난 14일 서울 동작구 한 카페에서 박 교수를 만나 남녀의 사랑, 부모와 자식의 사랑부터 이웃에 대한 사랑을 넘나들며 오늘날 위기에 놓인 사랑과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의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니체와 하이데거를 전공한 박 교수는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 ‘사는 게 고통일 때, 쇼펜하우어’ 등을 통해 일상의 불안과 우울에 대한 철학적 실마리를 모색해왔다.

―프롬은 어떤 사상가인가.

“깊은 사상을 쉽게 풀어쓰는 재능을 지닌 철학자다.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은 탓에 학계 일부에선 그를 ‘통속적 사상가’라고 깎아내린다. 하지만 일반 대중 역시 인간·삶·행복 등 철학이 다루는 주제에 대해 일정한 관심과 이해를 지니고 있음을 고려하면 ‘심원한 사상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은 철학자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다. 프롬은 철학자인 동시에 정신분석학을 연구하는 의사이자 사회학자였다. 글의 명료함은 정신분석학의 임상 사례와 사회학이 다루는 구체적 현상을 끌어들인 덕분에 가능했다. 프롬의 글쓰기는 폄하될 게 아니라 철학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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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서문에 ‘사랑은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상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제목처럼 사랑에도 배움의 기술이 필요한 이유는.

“사랑이 ‘난제’인 것은 흔히 사랑할 대상만 발견하면 감정이 저절로 따라오고 유지된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사랑이 이뤄지면 처음에 기적처럼 존재했던 친밀감은 약해진다. 설렘으로 충만했던 자리엔 실망과 환멸이 들어선다. 사랑은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갈등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설렘을 영원히 유지할 수 있는 ‘운명의 짝’을 찾는 게 아니라 성숙한 인격과 상대에 대한 신뢰로 갈등을 극복하는 지혜다. 프롬이 사랑은 단순히 ‘즐겁고 흥분된 감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연마하고 훈련해야 하는 기술’이며,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라고 말하는 이유다.”

―현대인의 사랑이 특별히 위험에 놓인 건 무엇 때문인가.

“프롬의 또 다른 대표작 ‘소유냐 존재냐’와 연관해 설명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랑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이유는 현대인들이 정체성을 ‘존재 양식’이 아닌 ‘소유 양식’에서 찾기 때문이다. 물질과 명성, 사회적 지위 같은 소유 양식이 사랑의 크기를 결정짓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선 신(神)을 향한 사랑조차 ‘성공에 필요한 능력’을 갈구하는 ‘기복신앙’으로 전락했다.”

―‘왜곡된 사랑’이 아닌 ‘참된 사랑’을 하려면.

“합일(合一)을 통해 ‘분리’와 ‘고독감’을 극복하되 각자 개성을 존중해야 한다. 이런 성숙한 사랑에선 ‘두 사람이 하나가 되면서 동시에 둘로 남아 있는 역설’이 성립한다. 프롬은 인격적으로 원숙한 사람만이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봤다. 인격적 성숙은 자기 자신에게만 빠져 있는 나르시시즘과 그저 타인에게 의존하려는 성향과 거리를 두는 데서 시작된다.”

프롬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에도 마찬가지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상대를 ‘소유’하려는 연인처럼, 부모가 아이를 자신의 일부라고 느끼는 한 사랑은 자기도취적 만족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프롬이 생각하는 ‘참된 부모’는 아이가 부모에게서 분리돼 독자적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 분리된 두 사람이 하나로 나아가는 남녀의 사랑과 달리, 하나의 울타리에서 출발한 부모와 자식은 성숙한 분리와 단절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프롬은 어떤 가정에서 성장했나.

“안타깝게도 외아들인 프롬이 없었다면 부모의 결혼 생활은 유지되기 힘들 정도로 비참했다. 부모들은 불행한 결혼 생활을 보상받겠다는 듯 외아들에게 집착했다. 프롬은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끝없는 근심 걱정과 어머니의 질식할 것 같은 소유욕으로 고통받았다. 프롬이 참된 사랑의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타인에 대한 존중’을 지목한 것은 이런 성장환경에서 비롯됐다. 프롬의 삶은 어떤 면에서 가정에서 받은 상처를 철학과 글쓰기로 치유하는 과정이었다.”

―프롬은 책에서 ‘부모의 행복’을 강조하는데.

“부모가 느끼는 감정이 자식에게 고스란히 전이된다는 것을 경험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아이를 독립적 인격체로 성장시키려면 부모가 먼저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부모는 자신의 공허감과 결핍을 아이를 통해 채우기 위해 아이에게 지나친 관심을 쏟는다.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긍정적 정신을 아이에게 심어주려면 ‘좋은 부모’일 뿐 아니라 ‘행복한 부모’여야 한다.”

프롬의 사유는 자식과 연인을 향한 사랑에서 사회의 ‘무력한 자’와 ‘이방인’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간다. 프롬은 곁에 있는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자만이 이해관계로 얽히지 않은 이웃을 품어 안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박 교수는 배타성이 없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사해동포적 사랑’이라고 명명한다. 도덕책에 나올 법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진부한 메시지 아니냐는 물음에 박 교수는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사해동포적 사랑은 극단적 진영 논리가 만연한 오늘 더욱 유효한 메시지라는 것이다. “애국세력과 빨갱이, 독립운동 세력과 토착 왜구 등 흑백논리에 입각한 프레임은 자신이 속한 집단만 정상(正常)으로 간주하는 ‘좁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인류에 대한 사랑과 분리된 좁은 사랑은 확대된 이기주의일 뿐이다. 프롬의 책이 단순한 지식과 정보 전달을 넘어 독자의 ‘인격 전환’을 유도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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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리히 프롬은

마르크스·실존철학 두루 받아들여 재정립…“가장 균형잡힌 사상가”


에리히 프롬은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개방적이고 균형 잡힌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정한 종교나 이데올로기에 얽매이는 대신 인간의 성장과 행복에 보탬이 되는 통찰을 기꺼이 수용했다.

프롬의 이 같은 특징은 20세기 양대 철학 사조로 극렬히 대립한 마르크스 사상과 실존철학을 두루 받아들인 데서 잘 드러난다. 박찬국 서울대 교수는 “이도 저도 아닌 ‘잡탕 철학’이 아니라 기존 이론을 창조적으로 계승해 독자적 사상을 정립했다는 데 프롬의 위대한 고유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프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카를 마르크스와 지크문트 프로이트다. 사회주의자였던 프롬은 마르크스처럼 인간의 경쟁을 심화시키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 변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경제구조만 바뀌면 이상적인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낙관한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와 함께 프롬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며 부정한 마르크스와 달리 선불교와 기독교·유대교 신비주의 등에 폭넓은 관심을 보이면서 ‘인간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종교에서 찾았다.

프롬은 정신분석학 대가인 프로이트 이론도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흔히 프로이트를 ‘성욕의 무분별한 분출’을 긍정한 사상가로 오해하지만, 프롬은 프로이트가 욕망에 지배당하지 않고 성찰을 통해 욕망을 통제하는 인격을 지향했다고 옹호했다. 다만 프로이트가 ‘남녀의 합일과 사랑을 성욕의 승화’라는 관점에서 파악했다면, 프롬은 ‘성욕을 사랑에 대한 열망의 발현’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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