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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나윤석 기자의 고전을 묻다

“27년전 ‘담장’ 넘은 두 소년의 사랑… ‘지옥’에서도 우린 성장한다”

나윤석 기자
나윤석 기자
  • 입력 2023-03-07 09:05
  • 수정 2023-03-0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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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이미지 크게보기 장진 감독이 지난달 20일 서울 중구 약수동 사무실에서 성석제의 단편집 ‘첫사랑’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첫사랑’은 성향도, 체구도 다른 두 사춘기 소년의 사랑과 끌림을 묘사한다. 김호웅 기자



■ 나윤석 기자의 고전을 묻다 - 장진 감독이 꼽은 성석제 ‘첫사랑’

당시론 파격적인 소재 ‘동성애’
기존 질서 맞서는 장치로 삼아

“사랑한다” “나도” 반전의 결말
사춘기 감정적 파노라마 묘사

은근한 웃음뒤 삶 곱씹게 하는
‘유머의 본질’다시 생각하게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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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제목 속에 지독한 성장담을 숨겨 놓은 소설입니다.”

영화감독이자 연극 연출가인 장진이 추천한 성석제의 단편 ‘첫사랑’은 1996년 발표된 성장소설로 중학교 3학년 남학생들의 독특한 사랑을 그린다. 소설집 ‘첫사랑’(문학동네)에 수록된 이 표제작은 공부는 잘하지만 연약한 주인공 ‘나’가 대도시 변두리의 한 중학교로 전학 오면서 시작한다. 전학 온 지 며칠 안 돼 힘센 동급생에게 얻어맞은 ‘나’에게 키가 한 뼘은 더 큰 ‘너’가 다가와 손길을 건넨다. 이름이 백승호인 ‘너’는 학교 양아치들이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소년. ‘나’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졸졸 따라다니며 관심을 드러내는 백승호를 밀어내지만, 이내 그와 가까워지며 미묘한 감정의 파도에 휩싸인다. 장진은 ‘흙먼지가 커다란 꽃처럼 피어올랐다’는 첫 문장부터 이 소설에 매혹당했다고 고백했다. 흙먼지에 가려 사방이 보이지 않듯 자기 마음조차 알지 못하는 혼돈의 시기가 ‘사춘기’라는 이름의 과거라는 것이다. 최근 연극 ‘서툰 사람들’ 폐막 후 드라마를 준비 중인 장진을 서울 중구 약수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 소설을 언제 처음 읽었고, 어떤 점에 끌렸나.

“성석제의 다른 작품들을 먼저 접한 뒤 2000년대 중반에야 읽었다. 구수한 해학의 작가로 알았던 그에게 전혀 다른 작품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나’의 1인칭 회고담인 소설에서 ‘겨울 가뭄’의 기운을 품은 건조한 문장들은 서늘하고, 마르고, 왠지 옷을 하나 더 입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안겨준다.”

‘나’와 백승호가 다니는 학교 이름은 지옥(地獄) 중학교. 심지어 학교가 위치한 동네는 지옥구 지옥동. 작가는 이런 노골적인 작명도 모자라 주인공이 동급생에게 맞은 날 대사를 통해 인물의 심리를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도 같을 것이었다. (중략) 바로 그때 나는 내 장래희망을 바꾸었다. 살아서 이 지옥을 빠져나가기.”

―자신이 처한 곳을 지옥으로 여기는 마음은 10대의 보편적인 심리일까.

“열네댓 살에 천국에서 살아간 사람은 누구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10대 중반이 되기 전까진 부모의 ‘주입’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중학생쯤 되면 부모가 알려준 가치가 실제 세계에선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가 전학을 오자마자 두들겨 맞으며 힘의 질서를 확인하는 것도, 백승호의 호의와 관심을 한동안 동성애로 여기며 거부하는 것도 가치가 재편되는 지옥에서 겪는 통과의례다.”

한국 퀴어 소설의 고전으로 꼽히는 ‘첫사랑’에는 성적 코드가 반복해 등장한다. 백승호는 성적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목욕탕 담장을 넘어 여탕을 엿보게 해준다. ‘나’의 발을 손으로 받쳐 올려준 백승호는 목욕탕 주인에게 들켜 넘어지면서 유리 조각에 엉덩이를 찢기고도 ‘나’에게 연신 “(제대로 못 보게 해)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힘센 너’가 ‘약한 나’에게 고개를 숙이는 역학 구도의 역전 속에서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지금은 퀴어가 흔하지만 당시엔 소재만으로 파격이었을 것 같다.

“이 작품을 ‘퀴어 소설’이라는 한 줄로 규정하는 건 좁은 해석이다. 목욕탕 에피소드에서 잘 드러나듯 ‘첫사랑’은 담장을 넘어 기존 질서에 맞서는 불온함을 성장소설의 틀에 녹인 작품이다. 동성애 역시 가치의 전복을 상징하는 장치로 읽어야 한다.”

‘나’와 ‘너’의 관계는 동네 학생들 사이에 은밀한 성적 판타지의 대상인 빵집 처녀의 등장으로 전환점을 맞는다. ‘나’의 친구가 아닌 연인이 되고 싶은 백승호는 대뜸 빵집 처녀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백승호가 일러준 대로 야심한 밤 뒷산에 숨어 둘의 애정 행각을 훔쳐보던 ‘나’는 그만 처녀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주인공의 첫사랑은 백승호가 아닌 빵집 처녀인가’라는 혼란이 솟을 무렵, 30쪽 남짓한 짧은 소설은 반전의 결말을 준비한다. 에필로그에서 ‘나’는 졸업식을 앞두고 학교 운동장에서 백승호와 마주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퇴학을 당한 백승호가 오랜만에 ‘나’를 찾아온 것이다. 두꺼운 외투를 입은 백승호는 ‘나’를 품에 안으며 말한다. “사랑한다.” 어쩐 일인지 군말 없이 안긴 ‘나’는 답한다. “나도.” 그리고 이어지는 1인칭 시점의 마지막 문장. ‘그때, 나는 비로소 내가 사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개 속도가 매우 빠른 소설에서 마지막 문장의 의미는.

“‘나’의 첫사랑이 빵집 처녀가 아닌 백승호라고 선언하는 문장이다. 다만 작가는 ‘명쾌한’ 결말 직전 등장한 빵집 처녀를 통해 ‘이게 사랑인가, 저게 사랑인가’ 하며 요동치는 사춘기의 감정적 파노라마를 펼쳐 보이려 한 것 같다. 감정이 논리를 압도하는 사춘기는 누구에게나 지옥이지만, 우리는 그 지옥 속에서도 끝내 성장했음을 새삼 느낀다.”

‘코미디 대가’인 장진에게 성석제로부터 받은 영향을 물었다. 장진은 성석제 덕분에 ‘유머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중요한 건 웃음의 ‘횟수’가 아닌 ‘질’입니다. 유머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첫사랑’조차 목욕탕 에피소드처럼 은근한 웃음이 나오는 장면을 통해 삶의 의미를 곱씹게 하니까요. ‘관객을 100번 웃겼다’고 자랑하는 대신 단 몇 번이라도 웃음 뒤에 알싸한 무언가를 남기는 연출가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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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는…
‘현대화된 루저’ 묘사 해학 넘치는 이야기꾼


1986년 시 ‘유리 닦는 사람’으로 등단한 성석제(사진)는 1994년 단편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발표하며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첫사랑’을 비롯해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위풍당당’ ‘왕을 찾아서’ 등이 대표작.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해학을 잃지 않는 인물들은 성석제의 트레이드 마크다. 문학평론가인 김형중 조선대 국문과 교수는 “풍자가 ‘조롱’을 통해 빚어지는 웃음이라면, 해학은 우스꽝스러운 인물을 연민으로 끌어안으면서 만들어지는 유머”라며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가난한 농부는 ‘바보스러운 인물’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한국문학사에서 성석제에게 영향을 준 ‘선배 작가’로는 이문구·송기숙 등이 꼽힌다. 이들은 걸쭉한 입담으로 서사를 풀어가는 ‘이야기꾼’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다만 김 교수는 “민중문학 계열인 이문구나 송기숙의 인물과 달리 성석제의 주인공은 ‘현대화된 루저’에 가깝다”며 “낄낄거리며 웃다가 돌연 성스럽고 숭고한 느낌을 전해준다”고 설명했다.

한편 장진 감독은 장편 ‘도망자 이치도’와 단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첫사랑’과 함께 추천했다. 원래 제목이 ‘순정’이었으나 개정판 출간과 함께 제목이 바뀐 ‘도망자 이치도’는 도둑의 탈주기를 통해 사회의 그늘을 성찰한다. 장진은 “캐릭터의 흡입력 덕분에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다 읽었던 소설”이라며 “지인들에게 한동안 ‘순정을 드립니다’라는 메모를 적어 선물했다”고 돌이켰다. 그는 또 중소 도시의 조직폭력배가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는 찰나를 다룬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에 대해선 “매우 용감하면서도 영화적인 작품”이라고 했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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