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연극 ‘영원한 평화’의 한 장면. 프로젝트 SOL 제공

‘프로젝트 SOL’의 첫 작품
의인화한 ‘개’의 시각으로
‘우리 안의 폭력성’ 재조명
칸트·파스칼·헤겔 재해석
철학적 사유를 웃음 포인트로

어쩌면 우리는 매일매일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폭력성에 길들여져 있을 지도 모른다. ‘프로젝트 SOL’(대표 허솔)이 제작한 연극 ‘영원한 평화’는 평화(라고 생각되는 것)를 위한 폭력, 혹은 ‘필요악’의 정당성에 관한 ‘윤리적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한다.

원작은 스페인의 국민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 그는 세계를 충격에 빠트린 ‘9·11테러’(2002년)와 2000여명의 인명 피해를 낸 스페인 ‘마드리드 열차 테러 참사’(2004년)를 접하고 글쓰기를 구상했다. 이후 국제공항에서 폭발물을 찾는 탐색견에서 작품의 모티브를 얻었다.

‘영원한 평화’는 엄청난 대사량, 음산한 전개 속에서도 웃음 포인트를 만들어내는 연출력, 그리고 90분 가까운 공연 시간 절반을 (개처럼) 땅에서 기거나 뛰게 만드는 가학적 퍼포먼스로 가득 차 있다. 폭력이 난무하는 경쟁사회의 매 순간들이 때론 유희적으로, 때론 비장감 넘치게 무대 위에 구현된다. 사람과 가장 친숙한 동물인 ‘개’가 전쟁과 폭력에 대해 논하고 갈등하는 모습은 기이한 상상력까지 제공한다.

이미지 크게보기 프로젝트SOL 대표 겸 배우 허솔

‘프로젝트 SOL’ 대표이자 배우 허솔은 “개와 인간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폭력의 양상들에 대해 관객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했다”고 제작 의도를 밝혔다. 여기에 유엔 결성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한 ‘영구평화론’의 저자 칸트의 실천이성적 사유, ‘신 존재 내기’를 촉발한 파스칼의 종교적 유희, 그리고 주인·노예의 변증법에서 ‘생사를 건 승인투쟁’을 개념화한 헤겔의 관념철학까지 작품에 촘촘히 배어 있다.

연극 ‘영원한 평화’는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대한민국 현대사의 축도(縮圖)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과 식민통치, 해방 및 건국 공간에서의 좌우 대결, 6·25전쟁, 4·19혁명, 5·16군사쿠데타, 권위주의 정권과 개발독재, 거친 산업화와 잔인한 민주화,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정치·경제·사회 제반 분야의 폭력성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전쟁과 폭력 없이는 진전될 수 없는 것일까. 그건 시인 김수영이 말한 것처럼 ‘모더니티의 모험’인 것일까.

“문 뒤에 테러리스트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다. 만약 우리가 저 자를 공격했을 때 그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면, 우린 무고한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반대로 저 자를 살려두었는데 그가 테러리스트였다면, 죄 없는 수많은 시민들이 죽을 위험에 놓이게 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미지 크게보기 연극 ‘영원한 평화’의 출연진. 프로젝트 SOL 제공

연극의 절정에 이르러 나오는 대사는 순간 관객을 ‘윤리적 딜레마’ 속에 밀어 넣는다. 평화를 위해 악(으로 생각되는 것)을 제거하는 일은 늘 정당화될까. 공연 중에 현란하게 펼쳐지는 파스칼의 ‘신 존재 내기’를 유심히 관찰한 관객은 “그렇다”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연극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나를 붙든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허무한 소멸’이어선 안 된다는 것.

죽음은 전쟁·테러·폭력과 쌍생아다.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해지고 죽음이 평화의 유일한 보증인 한, ‘영원한 평화’는 없다. ‘영원한 평화’를 쓴 칸트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책에 “영원한 평화는 무덤 속에서나 있다”고 썼다.

‘영원한 평화’는 ‘우리 안의 폭력성’에 대한 반(反)명제로 세상에 등장했다. 하지만 책에서도 연극에서도 평화로 가는 출구는 찾지 못한 것 같다. 폭력의 경로의존성에 기댄 현대사회의 어찌할 수 없는 비극인가.

이미지 크게보기 프로젝트 SOL 제공

※연극 ‘영원한 평화’는 ‘프로젝트 SOL’의 첫 제작 작품이다. 김명섭·정대진·이석구·허솔·이정은·이송희 배우가 출연한다. ‘프로젝트 SOL’은 배우들의 공동창작 방식을 추구한다. 연극 ‘영원한 평화’에서 모든 배우들은 실연자면서 동시에 창작자로서 작업을 진행했다. 서울 성북구 여행자극장에서 30일까지.

박준희 기자 vinkey@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