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판단력을 갖췄다는 것, 즉 건전한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단지 지식에 도달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실현해야 할 정당하고 건전한 가치를 요구하는 데 이르러야 비로소 판단력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인공지능(AI) 시대의 도래는 AI가 이런 수준의 판단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한다. 게티이미지뱅크

■ 서동욱의 지식카페 - (29) AI시대의 ‘판단력’

판단력은 여전히 인간 고유의 영역… 칸트 “책에서 배울 수 없는 천부의 능력” 역설
알파고, 바둑의 일반규칙에 맞추어 상황 파악… ‘러의 우크라 민간인 대학살’비판은 도덕적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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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하며 개인적으로는 ‘판단력’의 정체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AI가 대체할 것으로 전망되기도 하는 고급 직종인 ‘법조인’이나 ‘의사’는 바로 판단력을 핵심으로 하는 까닭이다. AI가 자신의 영토로 삼으려고 도전하고 있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 바로 판단력이며, 제대로 된 판단력을 갖출 수 있느냐에 따라 AI의 성공 여부도 결정되리라.

판단력은 인간 정신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한 번의 판단에 따라 개인이나 집단의 운명이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우리는 무엇인가가 잘못됐을 때 ‘오판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예컨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가 형편없는 군사력을 스스로 공개하며 맥을 못 추는 러시아는 자신의 능력을 ‘오판’했다고 사람들은 비웃는다. 능력과 도덕성 모두에서 이토록 수치스럽고 더러운 군대는 인간의 역사에서 처음일 것이다. 또 나이 들어서 ‘총기(聰氣)’가 사라졌다는 다소 슬픈 표현도 판단력의 쇠약을 가리키는 말이다.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실수는 바로 판단력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

그러면 판단력의 약화를 방지하기 위해 판단력을 공부해서 배우면 되지 않는가? 지식을 선생님이나 책에서 얻듯이, ‘판단력’도 선생님이나 책으로부터 배우면 되지 않는가? 그러나 판단력은 지식처럼 배울 수 없는 ‘천부의 능력’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는 ‘삼단논법’을 예로 들어보자. 삼단논법은 그저 단순하고 기초적인 추리 방식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인간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한 점도 미지의 것으로 남기지 않고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였다. 어떻게 이 도구는 기능하는가? 지성이 생각해내는 대전제는 하나의 보편적 규칙으로서 이렇게 예화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여기서 ‘죽는다’라는 것이 보편적 규칙이다. 소전제는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이고, 결론은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이다. 소전제는 소크라테스라는 구체적인 개별자를 매개념, 즉 대전제에서 규칙(죽는다)이 적용되기 위한 조건(인간)에 포섭한다. 규칙의 조건에 포섭된 것은 규칙에 따라 규정되므로, 추론은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결론을 얻어낸다. 이런 식으로 삼단논법은 모든 개별자를 보편적 규칙 아래 규정하는 힘을 발휘한다.

여기서 판단력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소전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라는 것은 하나의 판단인데, 경험에 주어진 하나의 인식 대상을 인간이라는 보편에 포섭하는 그 판단은 어떻게 성립하나? 하나의 개별자, 즉 소크라테스를 어떻게 인간에 속한 것으로 판단하나? 원숭이나 유인원이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은 아니고? 이런 판단을 위한 지침이나 교본은 없다. 이 판단은 그냥 천부의 능력으로서 판단력이 담당한다.

판단력이 지식을 획득하듯이 학습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이길우 외 역)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판단력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 훈련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오히려 일종의 감각과 같은 능력이다. 판단력은 결코 배워서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판단력은 책을 펴고 배울 수 있는 지식 같은 것은 아니다. 혹시라도 판단력의 계발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운전이나 테니스 같은 실제적인 ‘연습’의 문제다.

판단력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칸트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규정적 판단력’과 ‘반성적 판단력’이 그것이다. 다소 낯선 명칭이지만, 이 두 가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보편적인 규칙이 주어졌을 때 개별적인 것들을 그 규칙 아래 포섭하는 능력이 규정적 판단력이다. 가령 법조문이 주어졌을 때 어떤 사건이 그 법의 적용 대상이 되는지 판정하는 능력이 규정적 판단력이다(뒤에 보겠지만 법의 적용 문제는 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반성적 판단력은 규칙이 주어지지 않고 개별적인 것만 있을 때, 이 개별적인 것에 대한 반성을 통해 규칙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들뢰즈는 의사의 진단을 반성적 판단력의 예로 제시한다. 의사가 환자의 증상을 진찰할 때, 예를 들면 티푸스 같은 병의 개념(인식)이 주어져 있지는 않다. 의사는 이 증상을 판단하고 티푸스라는 병의 개념과 이 병의 규칙을 발견한다.

그리고 티푸스라는 개념을 인식한 후 이뤄지는 치료상의 결정은, 규칙이 주어졌을 때 사례에 그 규칙을 적용하는 규정적 판단력의 예가 된다. 환자가 티푸스에 걸렸다는 것을 알 때 어떤 치료상의 결정을 할 것인가? 일반적 개념(티푸스와 그 치료 방법)은 주어져 있으나, 환자 개인의 체질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어느 시기에 어떤 치료 방법을 적용해야 하는지는 천차만별이다. 여기서 개별 사례에 보편적 치료의 규칙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능력이 규정적 판단력이다. 알파고가 이미 주어진 바둑의 일반적인 규칙에 맞춰 개개 상황을 판단한 것도 규정적 판단력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면, 반성적 판단력은 의사의 진찰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삶 전반에서 흥미롭게 작동한다. 어떤 사람들은 눈치가 빠른데, 이 눈치의 정체가 반성적 판단력이다. 동료나 상사의 표정을 잘 읽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얼굴을 독해해서 ‘그는 느긋한 성격의 사람이다’ 또는 ‘그는 조급한 성격의 사람이다’ 등등 정보를 얻어낸다.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로 얼굴에 담긴 독특한 기색으로부터 ‘느긋한 성격의 사람’이라는 일반 개념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이런 얼굴의 기색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은 반성적 판단력의 자질이 결여됐다고 할 수 있다.

만일 AI 의사가 가능한 시대가 온다면, 그것은 저 천부의 능력인 반성적 판단력과 규정적 판단력을 AI가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개별적인 사례가 주어졌을 때 그 사례가 속하는 일반적인 개념(가령 티푸스라는 병의 명칭)을 찾아내는 것(반성적 판단력), 그리고 티푸스(일반 개념)에 걸린 환자에게 그의 개인적인 정황에 맞춰 치료 방식을 판단하는 것(규정적 판단력) 말이다.

어쩌면 AI는 이런 판단력을 익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판단력은 우리가 다룬 것보다 훨씬 풍부한 작용을 담고 있다. 판단력은 단지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그것이 속하는 보편적인 규칙을 발견하거나, 보편적인 규칙이 주어졌을 때 그에 따라 개별적인 것을 판단하는 능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판단력은 ‘이렇게 돼야 한다’는 식으로, 가치가 관철되기를 ‘요구’한다.

가다머는 말한다. “건전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특수한 것을 일반적 관점에서 판단할 능력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사물을 올바르고 정당하고 건전한 관점에서 바라볼 줄 안다.” 판단은 실현해야 할 정당하고 건전한 가치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판단력은 능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제기될 수 있는 요구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처참한 민간인 살해를 ‘전쟁 범죄라는 일반적인 법조항’에 귀속되는 사례로 판단한다. 그러나 판단력이 하는 일은 이렇게 한 사례를 일반 개념 아래 포섭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더 중요하게 판단력은 이런 범죄의 사례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요구’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판단력(judgment)은 개개 사태에 대한 심판(judge)이다.

법학적 맥락에서 이 점을 좀 더 살펴보자. 가다머는 말한다. “구체적인 경우들을 바르게 평가하는 데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특히 법학에서 판단력의 이러한 기능이 나타난다.…법에는 일반적 원칙의 바른 적용 이상의 것이 늘 문제가 된다. 법과 도덕에 관한 우리의 지식도 언제나 개별 사례에 의해 보충된다.…법관은 법을 단지 개별적인 경우에 적용할 뿐 아니라, 자신의 판결로 법의 발전(‘판례법’)에 기여한다. 법과 마찬가지로 도덕도 개별적인 경우의 생산성에 힘입어 지속적으로 발전한다.”

법적 판단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의 사건에 적용될 일반적 규칙(법조문)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판례가 탄생한다. 그러나 이는 판단력이 기계적으로 하나의 특수한 사건과 그것이 귀속되는 일반적 규칙을 연결하고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판단력은, ‘이 사건에 대해 이 법을 적용해서 도덕적 가치를 달성해야 한다’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판단은 비난이나 칭찬을 포함한다.

즉 판단력은 단지 지식에 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사례(민간인 살해)가 어떤 일반적인 개념(전쟁범죄)에 속하는지 판단하는 일은 지식을 획득하는 일이다. 동시에 판단력은 이런 살해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요구를 전 인류에 대해 하고 있다. 이런 요구는 세상이 지향해야 하는 도덕적 이념에 입각해 이뤄지는 것이다. 사례가 귀속되는 일반적 규칙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지식이지만, 전쟁 범죄라는 일반적 법 조항을 통해 규정된 민간인 살해라는 이 사례가 과연 일어나도 좋은지 도덕적 이념에 비춰 판단하는 일은 지식이 아니다.

판단력의 위대함은 지식을 얻는 데 있지 않고, 바로 도덕적 이념에 비춰 이런 사태가 일어나도 좋은지 심판하고 비난하는 데 있다. 도덕적 가치에 입각한 이런 판단(심판)은 인간의 운명을 다루는 의학과 법학의 핵심을 이룬다. 판단력을 습득한 AI가 보편적 규칙을 발견하거나 적용하는 지식의 획득 차원에 그치지 않고 가치라는 심급에 따라 ‘이렇게 돼서는 안 돼’라는 요구를 하는 판단력의 화신이 될 수 있을까? 만일 정말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공지능’이 아니라 ‘인공양심’일 것이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판단력 다루고 있는 중요저작들 : 인간이 지닌 천부의 능력으로서 판단력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대표적인 저작은 칸트의 ‘판단력 비판’(1790)이다. 판단력이 어떻게 ‘과학적 지식의 세계’와 ‘도덕적 세계’를 체계적으로 통일시켜줄 수 있는지를 모색하고 있는 책이다.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1960)은 현대 해석학을 대표하는 책이다. 여기서 다루는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판단력이 작동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환경으로서 교양, 공통감, 취미 등이 가지는 중요성을 해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