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최기숙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신간 ‘계류자들’에서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 나타나는 21세기 귀신의 진화 과정을 살핀다. 사진은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위부터 시계방향), 영화 ‘신과 함께: 죄와 벌’, 영화 ‘그녀’ 스틸컷. 자료사진

■ 계류자들│최기숙 지음│현실문화

맹목적이고 무차별적인 ‘좀비’
권력과 욕망만 좇는 인간 상징

인간과 공생·동거…협력 모색
치유하고 돕는 ‘영적 파트너’

AI도 21세기 귀신 범주에 포함
최첨단 기술 총화…기대와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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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귀신은 차별에 대항하는 ‘변혁의 아이콘’이자 ‘인간과 공생하는 협력자’다.”

전통적으로 아시아에서 귀신은 ‘존재론적 소외’를 상징한다. 귀신이 품은 상처와 한(恨)은 인간 세상의 부조리와 탐욕을 드러낸다. 할 말이 있어 생사의 벽을 통과해 나타난 그들은 현실이 죽음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안전지대’가 아님을 폭로한다. 귀신의 출현이 단순한 ‘위험 신호’를 넘어 불완전한 현실을 ‘교정하는 기회’가 되는 이유다. 최기숙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의 ‘계류자들’은 귀신에 관한 아시아 전통담론을 토대로 ‘21세기 귀신’이 어떻게 시대정신을 반영해 진화하고 있는지 분석한다. 한국·일본 등 아시아 콘텐츠를 중심에 놓되 서구의 영화와 소설까지 살피며 생과 사의 중간계에 ‘계류’하는 현대적 귀신의 미학적 양상을 탐색한다.

책은 21세기 귀신을 세 갈래로 분류한다. 첫 번째는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변혁의 주체’다. 주로 ‘좀비’라는 신흥 귀신으로 표상되는 이들은 전통귀신처럼 트라우마를 안고 있지만 보다 맹목적이고 무차별적이다. 영화 ‘부산행’과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등이 묘사하는 좀비는 생존이 다른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인간성 파괴의 징후를 드러낸다. 고민과 갈등은 접어두고 가공할 행동력으로 물어뜯는 좀비를 향한 인간의 혐오는 질주하는 동작으로 가시화된다. 하지만 좀비 또한 자신을 혐오하는 인간을 혐오하기는 마찬가지다. 어깨를 늘어뜨린 채 피로에 찌든 좀비의 표정은 곧 속도 경쟁에서 패배한 현대인의 얼굴이며, 권력과 욕망을 좇을 뿐 ‘인간 됨’을 상실한 인간은 짐승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21세기 귀신의 두 번째 부류는 인간 사회에 피해를 안기는 대신 인간과 공생하거나 동거하며 협력을 모색한다. 증강된 초능력으로 인명을 빼앗는 좀비나 흡혈귀와 전혀 다르다. 2017년 말 개봉해 1400만 관객을 불러모은 김용화 감독의 ‘신과 함께: 죄와 벌’은 화재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소방관이 일곱 개의 지옥을 통과하며 재판받는 신화적 판타지다. 저승사자인 세 명의 차사는 다정하고 성실했던 망자의 삶을 적극적으로 변호해 무죄를 이끈다. 저자는 “천만 관객이 흘린 눈물은 ‘사람은 스스로 포기하더라도 신은 인간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애원”이라고 분석한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단편 ‘하나레이 만’ 역시 인간과 더불어 존재하는 귀신을 보여준다. 사치의 아들 다카시는 하와이 하나레이 만에서 서핑을 하다 상어에게 다리를 물려 익사했다. 해마다 기일이 되면 해변에 앉아 아들을 애도했던 엄마는 어느 날 청년 서퍼로부터 “혹시 여기서 외다리 서퍼를 보신 적 있냐”는 질문을 받는다. 외다리 서퍼가 아들의 유령임을 확신한 사치는 해변을 헤매며 찾아보지만 결국 실패한다. 사실 아들이 살아 있을 때 모자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 엄마는 말 안 듣고 마약을 하는 아들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엄마는 아들의 혼이 해변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음을 알게 된 후에야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하나레이 만이 아들을 애도하는 장소가 아니라 아들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치유의 장소로 바뀐 것이다. 이와 함께 웹툰 ‘바리공주’, 로맨스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 등도 인간과 귀신의 교섭 가능성을 살핀 콘텐츠다. 저자는 “귀신은 생전의 인간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삶을 떠안은 연장체”라며 “귀신을 ‘영적 파트너’로 사유하는 흐름은 인간과 귀신이 분리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상상력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책은 많은 과학소설(SF) 영화가 묘사하는 인공지능(AI), 즉 비인간 안드로이드도 21세기 귀신의 범주에 포함한다. 노화하지 않기에 죽지도 않는 이 ‘포스트 휴먼’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엔 기대와 공포가 교차한다. 최첨단 기술의 총화인 21세기 귀신은 우리 삶을 한층 편리하게 만들지만,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 문명을 등에 업고 인간 역량을 뛰어넘을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그녀’는 인간과 AI의 복합적 관계에 대한 사색을 요청한다. 대필 작가 테오도르는 외로움을 달래려 AI 사만다를 구매한다. 처음엔 고객을 만족시키는 ‘상품’ 수준에 머무르던 사만다는 스스로 정보처리 능력을 향상하며 고객의 행동을 지시하고 삶의 방향을 안내한다. 테오도르는 자신보다 자신을 잘 아는 AI에 길들여져 재채기까지 간섭받는 수준으로 퇴행한다. 책은 영화처럼 AI가 ‘신적 존재’로 격상하는 순간 인간이 어떻게 공존 방안을 찾아야 할지 묻는다.

이들 세 부류의 귀신은 형상도, 존재 이유도 다르지만 우리가 답을 찾지 못한 시대의 질문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삶의 진실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외면해선 안 되는 존재다. 저자의 말처럼 귀신의 사연은 ‘사사로운 것’일지라도 우리의 관심과 대응은 ‘사회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 오늘 밤 잠자리에 들다 귀신을 본다 해도 깜짝 놀라 이불을 뒤집어쓰지 마시라. 귀신이 사람을 부른 게 아니라 사람이 귀신을 부른 것이니. 경청하는 자를 만날 때까지 현실에 균열을 내는 귀신은 반드시 ‘진상 규명’이 필요한 ‘미제 사건’이니. 408쪽, 1만8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