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캐서린 맨스필드, 이디스 워튼, 율리 체, 버지니아 울프(왼쪽 부터)

-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여성과 공포’ 주제로 5권 펴내
온라인 서점서 상위권 올라

- 은행나무 에세 시리즈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 선봬
매월 1종 출간…11종은 초역

- 궁리출판 에디션 F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3부작
여성 서사 주목도 긍정 평가

‘82년생 김지영’을 전후로 한국 문학 전반을 이끌고 있는 건 ‘여성 서사’다. 비문학에선 여성의 몸과 심리, 변화된 생활양식을 아우르는 인문 교양서와 에세이가 대세다.

다소 느린 감이 있지만, 이 흐름이 세계문학 출간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페미니즘 요소가 짙은 소설들이 새롭게 발굴되는 등 지금의 젠더 감수성과 호흡하는 작품들이 속속 선보이고 있는 것. 최근엔 100% 여성 작가로 이뤄진 시리즈도 나왔는데, 어떤 작품은 여성이 쓰고, 여성이 번역하고, 여성이 평했다. 이쯤 되면 문학도 ‘F등급(Female-rating)’ 시대. 남성 중심의 기존 문학 정전의 틀을 벗어나 세계 문학의 존재 의의를 다시 일깨우는, 여자의, 여자에 의한, 그러나 여자만이 아닌 ‘모두’를 위한 이야기가 온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여자들이…새롭고 재밌는 고전 = 최근 휴머니스트 출판사는 세계문학 브랜드를 새롭게 선보여 이목을 끌었다. 국내 대표 인문 교양서적 전문 출판사가 처음 문학에 도전한 데다가, 방식도 독특해서다. 하나의 주제에 대한 다섯 권의 책이 나오고, 4개월에 한 번씩 시즌제로 출간한다.

첫 시즌의 주제는 ‘여성과 공포’.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이디스 워튼의 ‘석류의 씨’, 도러시 매카들의 ‘초대받지 못한 자’ 등 공포·고딕 소설 위주로 작품이 선정됐다. 시리즈를 기획한 이성근 휴머니스트 편집자는 “문학사에서 고딕 소설이 평가절하돼 온 것과 여성 서사가 폄하돼 온 것은 어느 정도 같은 맥락 안에 있다”며 ‘여성’과 ‘공포’를 하나의 테마로 묶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새로우면서도 대중적이고 가독성이 높은 작품을 기준으로 해 큐레이션 했다”면서 독자들이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 다시 느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다섯 작품을 모두 여성이 번역했으며, 강화길, 최은영, 정희진 등 국내 여성 작가들의 서평이 담긴 미니 매거진도 부록으로 들어 있다. 여배우와 여성 스태프의 참여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영화의 ‘F등급’을 적용한다면, 이 시리즈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합격’.

출간 일주일이 지난 현재(2월 15일 기준), 다섯 권 대부분이 주요 온라인서점 고전 분야 판매 상위권에 올라 있다. 오는 6월 공개될 두 번째 시즌의 주제는 ‘국경의 사랑’이다. 조르주 상드의 ‘녹색의 장원’ 등이 출간을 기다린다.

이미지 크게보기 왼쪽부터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 파티’(궁리출판 에디션F)·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은행나무 에세)·이디스 워튼의 ‘석류의 씨’(휴머니스트 세계문학)의 표지.

◇고전의 반열에 오를 현대 여성 작가들을 만나다 =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지난달 론칭한 ‘에세’ 시리즈는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시작으로 매월 한 종씩 출간된다. 1월 선보인 울프의 ‘등대로’를 제외하면, 올해 예정된 11종이 모두 국내 초역되는 여성 작가의 작품들이라는 게 가장 큰 특징. “새로운 고전이 될 작품들 위주로 골랐다”는 주연선 은행나무출판사 대표의 말대로, 출간 예고된 에세의 작품 목록은 순문학과 장르 문학의 이분법적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구성을 보인다.

무엇보다 작가와 작품이 상대적으로 젊다. 중국의 ‘카프카’로 불리는 찬쉐, 독일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일본 작가 다와다 요코,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프랑스 작가 마리즈 콩데 등 지금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며, 미래 ‘고전’이 될 여성 소설가들이 대거 포진했다. 특히, 3월에 출간 예정인 독일의 젊은 작가 율리 체의 ‘인간에 대하여’는 팬데믹 상황을 직접적으로 다룬 최초의 소설이라 더욱 주목된다. 책은 지난해 3월 현지 출간됐다.

올해 여성 작가의 책 12권으로 출발하지만, 은행나무 세계문학 시리즈는 여성 서사와 여성 작가로 그 범위를 한정 짓지는 않을 예정이다. 심하은 은행나무 해외문학 편집장은 “기존 세계문학 전집과 비교하면 에세 시리즈의 여성 작가 비중이 월등히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내년부터는 남성 작가까지 범위를 넓힐 예정”이라고 했다. 심 편집장은 “남성 작가라고 해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장르적 요소가 있는 독특한 작품들로 구성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조용히 세상을 움직여온 여성 작가들의 책 = 인문·과학 서적을 주로 내는 궁리에서도 2020년부터 여성 작가 세계문학 시리즈 ‘에디션 F’를 선보여 왔다. 시작은 샬럿 퍼킨스 길먼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3부작. ‘내가 깨어났을 때’ ‘허랜드’ ‘내가 살고 싶은 나라’를 출간한 이래 지금까지 7권이 출간됐다. 여성 최초 퓰리처상 수상작가인 이디스 워튼, 20세기 단편 문학의 정수 캐서린 맨스필드, 일본 근대 문학의 선구자 히구치 이치요 등 굵직한 이름이 많이 보인다. 워튼의 ‘제인의 임무’와 맨스필드의 ‘가든 파티’, 그리고 가장 최근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길 위의 편지’가 문학 독자들의 입소문에 힘입어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처음부터 에디션 F가 ‘여성’을 키워드로 하는 에세이나 인문 교양서들만큼 시장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린 건 아니다. 책 동네에선 의미 있는 출간으로 주목받았으나,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진 않았다. 하지만 궁리출판은 우직하게 그 목록을 채워왔고, 최근 페미니즘과 여성 서사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높아지며 재평가 받고 있다. 에디션 F의 모토처럼 ‘조용히’ 세상을 움직였다고 할까. 김현숙 궁리 주간은 “여성 서사에 대한 주목도가 높지만, 그렇다고 바로 문학책 판매로 연결되지는 않더라”면서도 “에디션 F가 다양한 책 생태계에 일조한다고 믿으며 여기까지 왔다”고 전했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