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한도현 장인이 가마 안에서 ‘황금진사’ 도자 작품을 들어 보이며 기뻐하고 있다.

■ 도예 명인 한도현 ‘황금진사’ 첫 가마 개방행사 가보니…

산 구릉에 만든 전통 오름가마서
자기에 새롭게 개발한 유약 발라
24시간 장작 불때고 4일간 식혀

작품 꺼낼때마다 “와우~” 함성
성공률 30%…흠집땐 망치로 깨
“불 다루는 솜씨 신기” 감탄 연발

“전통방식으로 새것 창조 힘들어
밥숟가락 놓을 때까지 정진할 것”

이천 글·사진 = 장재선 선임기자

이미지 크게보기 장작으로 불을 때는 전통 오름가마(위 사진). 그 안에서 불에 구워진 도자기 작품들이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다(가운데). 한도현 장인은 조금이라도 흠이 있는 작품은 망치로 부수며 “깨져야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아래).

“이건 불이 만든 예술입니다. 황금진사(黃金辰砂)는 지금까지 세상에 없었는데, 저에게 행운이 찾아온 것이지요.”

도예가 한도현(62) 장인은 이렇게 말하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12일 경기 이천 ‘한석봉도예’의 전통 가마 안에서 작품을 꺼내다가 잠시 쉬던 중이었다.

이날 그는 산의 구릉을 이용해 만든 전통 오름가마에서 도자 작품을 꺼내 공개하는 의식을 열었다. 24시간 장작불을 때 굽고 4일을 식힌 후 진행한, 이른바 ‘가마 열기’ 행사다. 올해 처음인 데다가 한 장인이 새롭게 개발한 유약을 발라 만든 황·청진사(黃·靑辰砂) 작품들을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여서 의미가 컸다. 지난 2009년부터 활동하고 있는 후원회 회원들이 초대를 받았다. 서울의 연세갤러리 아카데미 회원 등 그의 작품 마니아들이 함께 자리했으며, 지역구 국회의원과 가수 김범룡 씨 등 연예인들도 행사를 지켜봤다.

“이번엔 코로나19 상황 탓에 인원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원래 가마를 개방할 때는 많은 분을 초대합니다. 큰 행사이지요.”

한 장인의 부인 김선희 씨가 나직한 목소리로 귀띔했다. 이날 행사 뒷바라지를 하는 김 씨에 대해 한 장인은 “내 분신”이라고 했다. 전기, 가스 가마를 활용하는 여느 도예가들과 달리 전통 장작가마를 고집하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겪어야 했던 시기가 수차례 있었음에도 그를 격려하며 오늘에 이르게 해 줬다는 설명이었다.

도자기의 고장인 이천에서 태어난 한 장인은 초등학교 때부터 도예반에서 물레를 돌렸다고 되돌아봤다. 고교를 졸업한 후 둘째 형이 하던 ‘동해도요’에서 일했고, ‘우당청자’로 유명한 한명성 문하에서 배웠다. 이때 한석봉(韓石峰)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문중으로부터 ‘석봉’이라는 호를 받을 정도로 도예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런데 그는 시장에서 잘 팔리는 작품을 만들지 않고 갖은 실험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려 했고, 그것이 실패하는 바람에 방황하는 시기를 겪어야 했다. 차 문화 운동 선구자인 박종환 선생과 형제, 친구들의 격려로 마음을 다잡은 후 지금껏 외길을 걷고 있다. 유약, 불 때기 등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했고, 2005년 청자적진사요변(靑磁赤辰砂窯變)을 완성해 도예가로서 명성을 얻게 됐다. 진사요변은 붉은빛이 감도는 전통 진사 도자기를 구울 때 불꽃의 성질이나 잿물 상태로 인해 가마 속에서 변화가 생겨 변색하거나 모양이 일그러지는 것을 말한다.

그는 2010년 서울 예술의전당에 초대돼 개인전을 함으로써 도예가로서 새 이정표를 세웠다. 2011년엔 이천시가 추천해 한국을 대표하는 도예가로 미국 샌타페이 아트 마켓에 진출한 후 세계 각지에서 전시를 열었다.

한 장인은 자신이 장작가마를 지키며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후원회 회원들 덕분이라고 수차례 말했다. “전통 가마를 꾸려가려면 인력, 자본이 많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저 역시 그저 가스를 때거나 전기를 이용해 돈벌이나 할 수밖에 없겠지요.”

평범한 회사원부터 유명인까지 각계 인사로 이뤄진 후원회 회원들은 도자를 빚어 유약을 바르거나 가마에 재고 불을 때는 작업을 다 도와준다고 했다. 이날 ‘가마 열기’ 행사에서도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한 장인이 가마 안에 들어가 작품을 꺼내면 입구에 서서 조심스럽게 받은 후 진열대에 정렬하는 작업을 했다.

“와우! 예쁘다. 어떻게 하면 저런 빛이 나지.”

작품을 꺼낼 때마다 좌중에서 이런 감탄이 흘렀고, 한 장인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가끔 미소를 흘렸다.

진사 작품을 수없이 빚었으면서도 거기에 노랗거나 파란빛이 섞이며 신비한 문양을 만들어낸 것이 스스로 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황금진사는 세계 최초”라는 말 속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내가 한 일은 작고, 불의 신비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지만, 그런 불의 작용을 이끌어내는 내공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쳤을 것인가.

이번에 작품 성공률은 30% 선이라고 그는 밝혔다. 100여 개를 빚었는데, 가마에서 꺼낸 후 그가 작품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30여 개라는 것이다. 그는 아주 작은 흠집만 있어도 망치로 깨 버렸다. 좌중에서는 탄식이 흘렀다. “아오, 아깝다 아까워. 내가 가져가면 안 되나.”

그에게 “작품을 깰 때 마음이 아프지 않냐”고 물었더니 “깨져야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선사 같은 답을 했다. 그를 후원하며 오랫동안 지켜본 장기철 전북도민회 부회장은 “전통 예술을 지금 세상에 통하는 작품으로 진화시키기 위한 한 장인의 노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전했다. 그는 “북극의 오로라보다 더 신기한 장작가마의 불을 자기 방식대로 다루는 한 장인의 작품이 앞으로 세계에 더 많이 알려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 장인도 “유럽 등에 나가 그들 것보다 월등한 우리 전통 세계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전통 방식을 지키며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 어려운 작업이지만, 밥숟가락 놓을 때까지 온 힘을 다해 정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