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상상못할 작업하려 내가 존재… 캔버스 세워놓고 자연이 그리게 해”

이미지 크게보기 김아타 작가가 작품 ‘ON NATURE, Red Mountain’을 설명하다가 문득 아득한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봤다. 군 사격장에 캔버스를 세우고 대포를 쏜 후 그 파편을 패치워크(짜깁기)한 것으로, 인간의 폭력 본성도 자연의 일부로 수용하는 작품이다. 신창섭 기자

■ M 인터뷰

- ‘온 네이처’ 작업 10년… 5월 모란미술관 초대展 김아타 작가

세계 주요도시에 캔버스 설치
비·눈·바람·햇볕의 흔적 담아
박테리아·해초류도 ‘붓’ 역할

작업실·전시장 ‘아르테논’엔
3년간 ‘대포가 그린 그림’도
포에 맞은 천조각 수거할 땐
마치 심장을 수습하는 느낌

잘팔린다고 그 작업만 하는건
자기 똥을 계속 먹는것과 같아

“가장 위대한 시(詩)는 아직 쓰이지 않은 시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시인의 존재 이유라 생각합니다. 그 시를 쓰기 위해 사유하고, 누구도 하지 못하는 깊이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나의 작업도 같은 이치입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고, 범접하지 못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아타(66) 작가가 지난 8일 보내온 메일 내용의 일부이다. 전날 만나서 대화를 나눈 것이 기분 좋아서 잠을 달게 잔 후 아침에 썼다고 했다.

“절대 고독이 아프지만, 깨진 독에 물을 부어야 합니다. 지독하게 사유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으면 보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 짓을 해야 합니다. 아름답고 화려하게 말입니다.”

그는 ‘깨진 독’에 물을 붓는 작업을 줄기차게 실천해 왔다. 지난 2019년에 펴낸 책 ‘白丁美學(백정의 미학)’에 그 이유가 나와 있다. “새는 물보다 더 많이 부으면 독은 찬다. 설령 독은 차지 않더라도 물은 어딘가로 흘러 길이 된다.”

지난 7일 오후 그를 만난 것은 오는 5월 전시를 연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경기 마석의 모란미술관이 재개관전으로 그를 초대했다고 한다. 지난 2014년 서울의 한 화랑에서 전시(RE-ATTA)를 연 이후 일반에게 작품을 공개하는 것은 처음이다.

경기 여주의 한적한 마을에 자리한 ‘아르테논(Art+Parthenon)’에 도착했을 때, 미소가 절로 나왔다. 과수원 옆 사면체 박스형 건물들의 독특한 외양에서 “미술관이라기엔 초라하지만, 자존감은 충만하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설계한 아르테논은 자택이자, 작업 공간이자, 전시장으로 조성했다. 자신의 작업이 미술 시장과 불통하는 듯한 느낌이 왔던 무렵부터 구상해서 실천에 옮겼다.

그는 2004년 뉴욕의 사진 전문 출판사인 애퍼처(Aperture)에서 한국인 최초로 사진집을 냈고, 2006년 미국 뉴욕 국제사진센터(ICP)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 8시간 노출로 세계 각 도시와 한국의 비무장지대(DMZ)를 담아낸 ‘온 에어(ON-AIR)’ 시리즈는 큰 화제를 일으켰다. 애퍼처의 편집장 멀리사 해리스는 이미 그 이전부터 상자(Box) 안에 인간의 본성 등 모든 것을 집어넣는 그의 ‘뮤지엄 프로젝트’에 주목하고 있었다. 한국 사진계 선배들이 그를 손가락질하며 “사진을 망친 놈”이라고 할 때, 자신의 작품을 알아봐 준 멀리사 해리스에 대해 김 작가는 “나를 살린 사람”이라고 했다.

뉴욕타임스가 2페이지에 걸쳐 ICP 전시를 소개하고, 빌 게이츠가 그의 작품을 구입하며 그는 세계 사진예술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국내 언론과 미술계에서 그를 집중 조명했다.

그런데 그는 상업적으로 잘나가는 길을 저버리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인류 문명과 관련된 세계 12개 도시를 주유하며 도시마다 사진 1만 컷을 찍고 그것을 중첩시켜 한 컷으로 만든 ‘인달라’(우주의 모든 것이 그물처럼 얽혀 있다는 뜻) 시리즈를 내놨다. 도시의 형체가 사라지고 색감만 희미하게 남은 인달라는 사람들을 당혹시켰다.

이미지 크게보기 인도 부다가야에 세웠던 ‘온 네이처’ 캔버스. 아르테논 제공

‘ON-AIR’ 시리즈의 절정으로 인달라 작업을 한 후 그는 2010년부터 ‘온 네이처(ON NATURE)’로 나아갔다. 사진을 넘어서 회화의 경계로 확장한 작업이었다. 세계 곳곳에 하얀 캔버스를 세워 놓고 자연이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이다. 부처가 출가한 인도 부다가야, 노장사상의 발생지인 중국 허난(河南)성, 원폭이 투하된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캔버스를 세웠다. 원시림이 우거진 강원도 인제, 미국 인디언의 거주지인 뉴멕시코의 샌타페이도 대상이었다. 비, 눈, 바람, 햇볕이 붓이 돼 시간과 더불어 그림을 그렸다. 땅속에서는 박테리아가 그림을 그렸고, 바닷물에서는 조개껍데기와 해초류가 화폭을 꾸몄다.

이런 작업에 대해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은 “아타 선생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며 격려했으나, 어떤 이들은 “한국에서 전시하는 그날부터 미술판에서 영원히 추방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갤러리들이 그의 전시를 주저하는 움직임도 생겼다.

“아예 나만의 미술 공간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했지요. 마땅한 땅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복숭아 과수원들이 있는 여주의 한 마을이 마음에 들어 3000여 평의 땅을 샀다. 2019년부터 건물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4월 아르테논을 개관했다.

그 입구에서 인사를 나누자마자 그는 뜰 가운데에 있는 건물인 ‘블랙 마운틴’으로 이끌었다. 마음을 닦기 위한 명상을 하거나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들어서니 온통 어둠이었다. 12m 높이의 천장에 조명이 있긴 하지만, 천체의 별처럼 아스라한 느낌을 줬다. 바닥은 그가 스승으로 삼은 성파 스님(조계종 차기 종정·통도사 방장)이 옻칠을 해 줬다고 한다. 스님은 1998년 남녀 모델이 나신으로 법당에서 가부좌를 하는 ‘니르바나 프로젝트’를 허락하고, 그에게 ‘아타(我他·나와 너가 하나라는 뜻)’라는 이름을 줬다. 그는 불교도가 아니지만, 그때 삭발을 한 이후 줄곧 그 모습을 지켜 왔다.

어둠 속에서 그가 이끄는 대로 벽면으로 향하니 대형 작품들이 벽화처럼 걸려 있었다. 그가 책에서 소개한 ‘대포(大砲)가 그린 그림’이었다. 전방 군부대 사격장에 캔버스를 세워 놓고 포를 쏜 후 갈기갈기 찢긴 천 조각들을 수습해 소독과 색 작업 등을 거쳐서 만든 것들이다. ‘ON NATURE’ 시리즈의 하나로, 2011년부터 3년에 걸쳐 이뤄졌다. 인간의 폭력 본성을 자연의 일부로 수용하고 직시하는 작업인데, 군부대를 설득하는 것뿐만 아니라 온갖 위험 요소를 제거해야 했기에 그 과정이 지난했다. 포 작업을 이해하고 작업에 동참해 준 아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편지를 썼을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무렵, 홀의 왼쪽 방으로 가니 붉은 천 조각으로 만든 작품이 보였다. “포에 맞은 천 조각을 수거할 때 마치 심장을 수습하는 느낌이었어요. 이거 보면, 꼭 사람의 핏줄 같지 않습니까?”

사물에게도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느끼는 점에서 동양 미학은 서양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가 이끄는 대로 홀의 오른쪽 별실에 가니 물을 담은 하얀 그릇 하나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자연의 치열한 생존 현장에서 버티는 모든 존재에 대한 제의 표현입니다. 예술은 치유 역할을 해야 하니까요.”

작품 전시장 역할을 하는 미술관 건물로 오니 그의 목소리에 활기가 묻어났다. ‘정신병동’과 ‘인간문화재’를 기록하는 사진에 몰입했던 시절부터 ‘해체’와 ‘실험’을 통해 예술 사진의 새 경지를 열어 간 역사를 실물 작품, 사진 프린트, 영상, 저서, 기사 등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여기서 ‘섞인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수차례 강조했다. “인물 100명의 모습을 섞으면 평균보다 훨씬 빼어난 외모의 사진 작품이 나온다”며 그 이미지들을 보여 줬다.

그는 오는 5월 전시가 ‘ON NATURE’, 즉 우리말로 ‘자연하다’ 시리즈를 선보이는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10여 년 동안 모든 것을 쏟아 만든 작품들이에요. 분량은 국립현대미술관 전체를 다 채울 정도로 많지만, 그중 뽑아서 제대로 보여 줄 것입니다.”

이번에 전시를 하는 모란미술관은 조각 전문 뮤지엄으로 한국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다. 작년에 설립 30주년을 맞아 대규모 리모델링 작업에 들어갔고, 올해 재개관을 하며 그 첫 전시로 그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연수 모란미술관장의 전시 제안에 바로 오케이를 했습니다. 따뜻한 품성을 지닌 분이셔서 제가 인간적으로 신뢰하니까요. 2014년 전시 때 저에게 ‘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 작품들이 한국 미술계의 배타적 시선을 받을 때여서 큰 위로가 됐지요.”

그는 빼어난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모란미술관이 ‘ON NATURE’에 어울린다고 했다. 전시장 공간에 어울리는 구성으로 일반에 처음 공개하는 작품의 아우라를 최대한 끌어올리겠다는 의욕을 표했다.

아르테논에서 그 일부를 미리 보니 작품마다 시각적 매력으로 발길을 붙잡았다. 자연이 그림을 그리게 한다는 파천황의 발상을 실제로 실천한 예술혼의 아우라가 컸을 것이다.

철학자인 이기상 한국외대 명예교수, 이주향 수원대 교수와 산악인이자 미술 저술가인 박인식 작가가 그의 5월 전시에 맞춰 글을 쓰고 있다고 한다. 병중(病中)인 이어령 선생은 구술을 통해 ‘김아타자연하다’의 의미를 이렇게 밝혔다.

“우주에 널어놓은 빨래와 같다. 찢어지고, 주름지고, 겹친 그것이 시간이고, 바람이고, 우주다. 이것이 ‘자연하다’의 철학이다. 자연이라는 명사를 동사로 만들어 에너지의 원천, 영혼의 원천을 기록했다.”

그는 세상 본질의 살코기를 발라내면서 칼의 날을 세우는 예술 백정 노릇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연하다’에 이르렀다고 했다. 우주 정거장에 빈 캔버스를 세우는 것이 마지막 단계라고 밝혔다. 그다음으로 캔버스를 세우지 않는 대형 작업으로 넘어가겠다는 것이 그의 귀띔이다. “예술은 자기의식을 배설하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잘 팔린다고 그 작업만 계속하면 결국 자기 똥을 계속 먹는 것과 같습니다. 예술하는 인간의 가치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 있습니다. 내일 죽더라도 오늘 지켜야 할 가치가 바로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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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상상못할 작업하려 내가 존재… 캔버스 세워놓고 자연이 그리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