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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헌·김월회의 고전 매트릭스 - ⑪ 정치 지도자의 수사

실천 않고 울림 없는 거짓말
공동체 위험·몰락으로 몰아

대선 앞두고 쏟아지는 말 말…
미래 위한 것인지 성찰할 때

이미지 크게보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포이닉스라는 스승을 붙여주었다. ‘말을 유창하게 하되’, 말만 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으로 키워달라고 당부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그려진 아킬레우스는 포이닉스의 교육이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우고 빛나는 무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군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시의적절한 해결책을 내놓는 탁월한 연설가이기도 했다.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의 힘은 일단 말에서 나온다. 자신감에 넘쳐 힘차게 울려 퍼지는 우아하고 품격 있는 말은 대중을 설득하고 난감한 분쟁을 해결하며 공동체에 빛을 비춘다. 헤시오도스는 ‘신통기’에서 이런 지도자의 수사(修辭)적 능력을 뮤즈 여신의 선물이라고 노래했다. 제우스가 점지한 ‘존경스러운 지도자의 혀 위에 뮤즈 여신들이 감미로운 이슬을 떨어뜨리면, 그의 입에서는 달콤한 말이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행동하면, 말은 말에만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된다. 그래서 지도자의 말은 공동체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그의 말이 진실과 진정성을 담지 못하고 피땀 어린 실천으로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되고 공허한 울림으로 흩어지고 만다. 당장 한 표를 얻기 위해 현란한 말을 쏟아내며 대중을 현혹한다면, 거짓에 휘둘린 공동체는 위험에 빠지고 몰락하게 된다. 그래서 지도자는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

아테네의 최고 교사였던 이소크라테스는 ‘안티도시스’라는 작품에서 ‘말(logos)은 영혼을 보여주는 그림’이며 ‘생각과 삶을 드러내는 아이콘’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말’은 말이 아니며, ‘거짓말’에 불과하다. 마음에 품은 생각과 다른 말, 즉 거짓말은 허공을 향해 하릴없이 짖어대는 개소리만도 못하다. 따라서 말을 잘하려는 노력은 말로 표현되는 생각과 영혼을 돌보는 일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연설가의 기술을 ‘레토리케’라고 불렀다. 우리는 ‘수사학(修辭學)’이라고 새긴다. 자신의 몸과 맘을 닦아내는 ‘수신(修身)’처럼 ‘말을 닦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요즘 대통령 후보자들이 수많은 말을 쏟아낸다. 그들의 말은 유권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며서 일단 무조건 던져보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온 삶을 걸고 마음과 생각, 뜻을 닦고 또 바르게 세워 ‘수신’하듯 정성스럽게 내놓은 ‘수사’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설가의 설득하는 기술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켜 ‘수사학’을 내놓았다. 허위와 거짓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소피스트적 궤변에 대중이 휘둘려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의 간절한 마음이 구구절절 배어있다. 진실과 정의에 선 연설가가 대중을 이끌어가는 건강한 공론의 장이 민주정의 단단한 초석이 되길 바랐던 것이다. 연설가의 신념이 청중의 마음에 자리 잡을 때 설득은 이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탐구했고, 세 가지가 필수적이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첫째, 이성(logos)에 부합하는 정연한 논리로 사실에 충실할 것. 청중은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궁금해하고, 가장 시의적절한 해결책을 갈망한다. 이때 이성적인 접근은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둘째, 청중의 감성(pathos)에 공감하며 정직하게 호소할 것. 연설가가 아무리 옳은 이야기를 해도 청중이 그럴 기분이 아니고, 관심이 딴 데 있다면 설득은 실패할 수 있다. 셋째, 인격과 품성(ethos)으로 청중의 신뢰를 얻을 것. 연설가가 아무리 옳고 공감이 가는 이야기를 해도 청중이 근본적으로 그의 품성에 의문을 품으면 그에게 등을 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설가의 품성이 설득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는다고 말했다.

이번 대선은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비호감’의 판이라고들 한다. 후보자들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말과 행동, 품성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경제적으로는 성장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성숙하지 못한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후보자든 유권자든 지금 우리에게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 수사학적 성찰이 아주 중요한 시기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