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추조 가즈오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이 지난 11월 1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자택에서 문화일보와 인터뷰하며 사케잔을 들고 다양한 일본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곽성호 기자

■ M 인터뷰 - 추조 가즈오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

해외 근무때마다 사케 소개
만날 사람 특성·배경에 따라
‘회심의 한병’ 미리 준비 대화

발령국가의 술 공부에도 열심
전주서 수제 막걸리 배워오고
공주 알밤 소주 양조장 견학도

주량 맥주 1병·소주 1~2잔뿐
예술품은 천천히 즐겁게 음미
국제 일본주 소믈리에 자격도

회에 고추냉이·초장 취향 있듯
각자의 방식 존중하는 게 외교
한일관계 냉각 ‘문화’로 풀어야

“일본주 ‘사케’는 제겐 최고의 무기입니다. 술은 장인이 만든 예술품이라고 생각하기에, 함께 음미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외교현장에서 사케를 건넵니다.”

‘술에 진심인 남자’ 추조 가즈오(中條一夫)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은 기자를 만나서 일본주 이야기를 시작하자 눈을 반짝였다. 지난달 말 인터뷰를 위해 방문한 ‘국제 일본주 소믈리에’ 자격증 보유자인 추조 원장의 자택에는 수백 권의 술 관련 서적과 함께 수십 병의 사케·일본 소주, 각양각색의 일본 술잔이 가득했다. 꺼내도 꺼내도 계속 나오는 술병들을 보며 ‘저건 냉장고가 아니라 술장고(술 보관용 냉장고)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미지 크게보기 추조 가즈오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장이 주말마다 무료 봉사로 하고 있는 일본주 수업의 교재 ‘일본주의 기본’ 표지.

추조 원장은 1993년 도쿄(東京)에서 열린 선진국 정상회의(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전신) 당시 만찬 건배주로 사용된 일본주에 감명받은 이후 미국·유럽연합(EU)·캄보디아·남수단 등 해외 공관에 근무할 때마다 주재국에서 사케·일본 소주를 소개해왔다. 지난해 8월 주한 일본 공보문화원장으로 발령받으며 세 번째 한국 생활을 시작하게 된 그는 서울에서도 사케·일본 소주 소믈리에 강사로 주말마다 무료 봉사를 하고 있다.

세계 어느 곳에도 지역 특산물로 만든 ‘술’은 존재한다. 일본 역시 1000여 곳의 양조장에서 지역별 사케를 만들고 있기에, 추조 원장은 그날 만날 사람의 특성과 대화 소재에 맞춰 ‘회심의 한 병’을 들고 외교 무대에 나선다. “한국에서 3년, 캄보디아 3년, 벨기에 2년 등 세계 곳곳에서 근무하며 느낀 건, 사케는 외교관뿐 아니라 비즈니스맨에게 좋은 무기라는 겁니다. 사케 얘기를 하면 일본 지리, 기후, 역사, 관광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다 할 수 있으니까요. 일본 술을 말하는 건 일본을 말하는 것과 같죠.”

추조 원장이 사케를 꺼내 들면 상대 쪽에서는 본인 나라의 술 이야기를 꺼내거나, 일본에 관한 기억을 공유하는 식으로 대화가 연결되며 인연이 이어졌다. 그중 ‘사케’라는 칼이 가장 잘 들었던 때는 언제였을까. 추조 원장은 남수단에서의 일화를 전했다. “아프리카 남수단이 내전 뒤 분리 독립한 직후에 일본대사관을 만들기 위해 출장을 간 적이 있습니다. 호텔 방에 간이 사무실을 만들고 일을 시작하자니 앞이 깜깜했죠. 남수단 정부 관계자와 첫 식사를 할 때 사케를 가지고 가 맛을 보여줬어요. 근데 그분이 술맛을 보자마자 ‘우리(남수단) 전통주인 아라크와 비슷하다’고 하더라고요. 아라크는 대추야자로 만든 남수단의 전통술인데, 독립 전 남수단은 이슬람국가여서 남수단 주민들은 숨어서 술을 마시는 설움을 겪었죠. 남수단이 분리 독립되고 나서야 아라크를 당당하게 마실 수 있게 됐던 겁니다. 사실 사케랑 아라크는 맛이 전혀 다른 술입니다. 하지만 그때 남수단 정부 관계자가 사케와 아라크의 맛이 같다고 말한 건 ‘일본도 민족의 술을 갖고 있구나’라는 동질감을 표한 것 아니었을까요. 그 후로 사이가 매우 좋아졌고 일도 순조롭게 진행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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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조 원장의 또 다른 철칙 중 하나는 ‘발령받은 국가의 술 공부에 마음을 다할 것’. 그 나라의 술을 통해 문화와 역사도 자연스레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전통주에도 관심이 많을 수밖에. 전주 막걸리 양조장에 직접 가서 수제 막걸리를 만들어오고, 공주 알밤 소주 양조장 견학을 다녀올 정도. “제가 과거 일본의 술에 대해 잘 몰랐던 것처럼, 한국 분들도 한국 술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더군요. 특히 희석식 소주(95% 주정에 물, 감미료 등을 넣어서 묽게 희석한 소주)와 증류식 소주(한국의 전통 증류주로 곡물로 담근 밑술을 증류해 만드는 술)의 차이점을 모르는 분이 많았어요. 한국 사람들에게 일본주를 소개하기 위해선 제대로 설명을 해야 하니 한국 술을 깊이 공부해야 했죠. 이렇게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배우면 자국에 대해서도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휴일에도 술 공부를 하러 지방을 찾아다닐 정도면 대체 얼마나 술을 즐기는 걸까. 호기심에 슬쩍 주량을 물어보니 의외의 답이 되돌아왔다. 주량은 맥주 1병, 일본주는 1∼2잔 정도라고. “술이 약한 만큼 좋은 사케를 조금씩 맛보는 걸 선호합니다.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맛보기 위해서 마시는 거죠. 제 술에 대한 지론입니다. 술 담그는 과정을 공부하니, ‘술은 장인들이 만드는 예술품’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술품은 천천히, 즐겁게 느껴야죠. 주말에는 한국 증류식 소주를 따라놓고 맛이 어떻게 다른지 혼자 블라인드 테스트 놀이를 합니다.”

그가 한국 전통주 이야기를 하면서 꺼내 든 한국 전통 소주만 5∼6병. 눈감고도 무슨 술인지 맞힐 정도로 한국 술에 깊이 빠져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한국 술과 일본 술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뭘까. “한국과 일본은 쌀로 술을 만든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죠.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미세하게 기후의 차이가 있고 온도·습도가 달라 나오는 미생물, 즉 누룩에서 차이가 나요. 한국의 전통 누룩은 여러 미생물이 있는 ‘누룩 방’이라는 공간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미생물 종류가 다양하고 맛도 좀 복잡합니다. 일본은 오랜 개발 끝에 일본주를 위한 누룩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회사가 있습니다. 그러니 미생물이나 곰팡이를 양조장 장인들이 선택할 수 있죠.” 추조 원장은 이어 “한국 지방에서 특산품 증류 소주를 만드는 장인들과 일본 소주 양조장 장인들이 서로 배울 것이 많은데 앞으로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네요”라는 소망을 밝혔다.

술 이야기의 끝은 결국 추조 원장의 업인 ‘외교’로 맞닿았다. 장기간 냉각기인 한·일 관계에서 외교는 어떤 의미일까. “제가 처음 한국에서 근무한 1990년대에 한 한국분과 일식집에 가니 참치회와 초장이 같이 나왔어요. 초장을 찍어 먹으면 참치 맛을 느끼지 못하지 않냐 했더니 같이 온 한국 분은 간장을 찍으면 와사비 향이 너무 강해 참치 맛을 느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알았습니다. 상대방에게 ‘올바른 참치 먹는 법’을 강요할 수 없다는 걸요. 외교와도 공통점이 있는 거 같습니다. 나라마다 다른 생각과 입장이 있을 테니, 서로를 무시하고 비판하거나 하나의 답을 강요할 순 없겠죠.”

인터뷰가 끝난 뒤, 추조 원장이 건넨 ‘예술품’ 한 잔을 건네받았다. 주말 동안 몇 번의 테스트를 거쳐 한국 증류식 소주와 일본 소주를 5:5로 배합한 혼합주를 만들었다고 했다. 7:3, 6:4로 타봤지만 역시 5:5가 제일 ‘목 넘김’이 좋았다며 그가 건넨 술은 머금자마자 묘한 열기를 피워낸 뒤, 이내 물처럼 스며들었다. 외교의 맛, 술의 맛. 쓰고도 달았다.

김선영·임정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