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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생 논객, ‘한국’을 말하다

“586은 책임지지 않는 쉬운 길 택했다”·“나쁜 관종들의 왜곡, 막대한 사회적비용 초래”
자신들만의 언어로 윗세대 규정… 구체적 이슈에 집중한 80년대생보다 사유 폭 넓어져

“당신과 나의 말하기는 판을 바꾸고 뒤집는 일이 된다. 권력이 우리를 호명하기 전에 스스로 부르고 명명하고 선언할 것이다.” (영화감독 이길보라, ‘당신을 이어 말한다’ 중에서)

‘88만원 세대론’에 이어 ‘MZ세대론’이 시대의 핵심 키워드로 떠오른 가운데 MZ세대 허리인 1990년대생 논객들이 한국 사회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임명묵·이길보라·김내훈·강남규 등 2030 논객들은 다른 세대로부터 ‘규정당하는 것’을 거부하며 글로벌 세대 특유의 자신감으로 무장한 채 기득권을 비판하고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이대남·이대녀(20대 남성과 여성)’라는 말이 드러내는 유권자로서의 정치적 영향력을 넘어 새 감각과 통찰로 공론장의 판도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586 기득권부터 주식 광풍, ‘나쁜 관종’까지 폭넓게 비판

서울대 학부생인 임명묵(1994년생)은 최근 신간 ‘K-를 생각한다’에서 K-팝·K-방역 등 접두사 ‘K’를 키워드로 우리 안의 자부심, 스트레스, 계층 세습과 서열화 등을 비판적으로 사유했다. 그는 ‘90년대생이란 누구인가’라고 물은 뒤 부모 세대인 586의 기득권 형성 과정을 되짚는다. 그는 586에 대해 “책임지는 주류의 어려운 길보다 책임지지 않고 주류를 비판하는 쉬운 길을 택했다”며 “586의 진짜 문제는 주류인데도 여전히 주류는 따로 있다고 여기는 고유의 비주류의식”이라고 꼬집는다.

한국 사회의 선동가를 분석한 ‘프로보커터’를 내놓은 연세대 박사과정 김내훈(1992년생)은 진중권·김어준·서민 등 대표 논객들을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나쁜 관종’으로 분석해 주목받았다. 그는 “프로보커터는 특정인이나 집단을 도발해 조회 수를 올리고, 세간의 주목을 밑천 삼아 영향력을 행사한다”며 “‘우리’와 ‘그들’을 구분해 가짜뉴스 등으로 이익을 챙긴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좋아요’와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 추태를 불사하는 무질서의 시대, 관심을 받기 위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는 ‘관종 멘털리티’가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1990년생인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자기 세대의 목소리로 공정 담론을 분석한다. 그는 평론집 ‘지금은 없는 시민’에서 “공정하게 불평등한 나라, 그게 우리 사회를 휘감고 있는 ‘공정성 담론’의 논리”라며 “평등한 기회와 정의로운 결과에 무관심한 기계적 공정성이 종국에 다다를 곳은 결국 불공정”이라고 일갈한다. 그는 거대 양당의 ‘원만한 합의’ 속에 대다수 시민의 이익이 ‘지연’되고 있다고도 꼬집는다. 다큐멘터리 ‘기억의 전쟁’ 등을 연출한 이길보라(1990년생)는 페미니즘과 장애인 중심주의에 입각해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이면을 들춘다. 이번 주 사회비평서 ‘당신을 이어 말한다’를 내놓은 그는 젊은 세대의 주식·부동산 열풍에 대해 “청년들의 현실과 한국 사회의 획일화된 가치관이 만나 주식·부동산에 관심 없는 이들을 바보로 만든다”고 냉소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더 많은 발언권을 쟁취하자. 마이크를 잡을 땐 여성·장애인·성소수자·동물 등을 위해 사용하자”며 또래 세대의 연대를 독려한다.

◇“90년대생 외침은 ‘선진국 현상’, 윗세대 규정하는 세대의 출현”

사회를 논평하는 ‘글쟁이’ 대열에 90년대생들이 대거 합류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2030 논객들은 “90년대생, 넓게는 MZ세대가 세상을 향해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고 자평한다. 이길보라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90년생이 온다’나 ‘88만원 세대’ 같은 책을 통해 ‘남들’이 우리를 규정하면서 정작 당사자들의 세계는 납작해졌다. 세대론을 말하는 주체는 그 세대 당사자여야 한다”며 “책은 ‘나의 언어’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치적 행위”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90년대생들이 세상을 향해 발언하는 모습을 일종의 ‘선진국 현상’으로 분석했다. ‘88만원 세대’를 쓴 우석훈 성결대 교수는 “자신의 정서와 가치관을 형성할 당시 ‘개발도상국 국민’이었던 586세대와 달리 20∼30대는 자랄 때부터 ‘선진국 국민’이었다”며 “90년대생들은 여전히 ‘개도국 정서’에 머물러 있는 윗세대를 향해 ‘공정’과 ‘정치적 올바름’의 이슈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장은수 출판평론가도 “윗세대를 ‘규정하는’ 세대의 출현”으로 평가하며 “‘규정하는 주체’로서 ‘왜 당신들은 30년 전 자아에 머물러 있느냐’고 날을 세우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MZ세대 맏형보다 사유 폭 넓히면서도 날렵·경쾌”

이들 90년대생 저자는 ‘잉여사회’의 저자 최태섭(1984년생),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대리사회’의 김민섭(1983년생),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의 천주희(1986년생) 등 2010년대 초중반 날카로운 감각으로 화두를 던진 MZ세대 맏형들과도 뚜렷이 구별된다. 이들 80년대생이 청년 빈곤, 시간강사 처우 등 자기 세대를 곤경에 내모는 구체적 이슈에 집중했다면 90년대생들은 사유의 폭을 사회 전반으로 확장하면서도 날렵한 필치를 잃지 않는다. 우 교수는 “80년대생 저작들은 200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신(新) 빈곤’ 키워드의 연장선에서 톤은 우울했고, 고전을 많이 인용한 글쓰기 방식은 클래식했다”며 “상대적으로 밝고 경쾌한 90년대생들의 책은 ‘옛날 사람 생각은 잘 모르겠고, 내 생각은 이렇다’는 식의 자기중심적 태도가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나윤석·박동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