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에세이를 통해 마라톤, 위스키, 재즈, 야구 등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나이 들었으나 나이 들지 않고, 오래됐으나 낡지 않는 ‘하루키 월드’는 그렇게 다양하면서도 일관된 취향이 바탕이 돼 만들어진다. 오른쪽 사진은 국내에서 발간된 하루키의 에세이들. ⓒIvan Gimenez_Tusquets Editores

■ 에세이 ‘무라카미 T’ 인기… 하루키 취향 완전정복

달리기 - 매년 한번은 풀코스 마라톤 완주
술 - 맥주·위스키… 흥나는 축제 같아
음악 - 레코드 그려진 티셔츠 무조건 사
여행 - 낯선곳 오래 머무는 상주 여행자
야구 - 진구구장서 소설가 되기로 결심
고양이 - 반려묘‘뮤즈’와 마음 교류 느껴
번역 - 슬럼프때 번역하며 글 쓸 힘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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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소설뿐 아니라 취미와 취향을 담은 에세이로도 인기가 높다. ‘어쩌다 모은’ 티셔츠를 소재로 한 최근작 ‘무라카미 T’(비채)는 출간 일주일 만에 주요 서점 에세이 부문 1, 2위에 올랐다. 누군가는 ‘냅킨에 낙서만 해도 잘 팔리는 작가’라고 하지만 사소한 것도 남다르게 풀어내는 재능과 좋아하는 것이라면 꾸준히, 열심히 하는 성실함이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이번 ‘무라카미 T’는 티셔츠에 대한 에세이지만 하루키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담은 ‘취향의 결정판’에 가깝다. 많은 티셔츠에 레코드가 그려져 있고, 위스키 이름이나 마라톤 대회명도 적혀 있다. 티셔츠만의 얘기가 아니라, 하루키가 티셔츠를 모으기까지의 많은 얘기가 담긴 것. 그 이야기의 바탕이자 시작, 하루키 스타일을 말해주는 에세이들을 키워드별로 정리했다. 이른바 ‘하루키 월드’ 취향의 완전정복이다.

◇달리기 =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하루키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밝힌 희망 묘비명이다. 소설가가 된 직후부터 달리기 시작했으니 벌써 40년이다. 평생 별로 아픈 데가 없어 ‘육체의 고통’을 잘 모른다는 하루키. 오래 달려서 그런 것인지, 그래서 오래 달릴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는 해마다 최소 한 번은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한다. 책은 하와이, 뉴욕, 아테네 등 그동안 참여한 마라톤에 얽힌 이야기들이지만, 넓게 보면 달리기를 축으로 한 그의 문학론, 인생론이다. ‘시드니!’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취재기인데, 마라톤에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그는 시드니에 가자마자 마라톤 코스부터 둘러보고, 경기 현장에서 꼴찌로 들어온 작은 나라 선수를 박수로 맞이한다. “선수에게는 저마다의 싸움이 있다”는 삶의 철학을 설파하면서.

◇술 = 하루키가 사랑하는 ‘주종(酒種)’은 맥주와 위스키다. “맥주의 나라에 가면 분명 VIP급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그는 “마라톤 완주 후 마시는 맥주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위스키 성지(聖地) 여행기’인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에선 생굴과 위스키를 함께 맛본 후 “인생이란 이토록 단순한 것이며, 이다지도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라고 노래했다. 소설 인물도 대부분 하루키처럼 ‘알코올 애호가’다. 국내 언론인이 쓴 ‘하루키를 읽다가 술집으로’에 따르면 1979∼2017년 발표한 14편의 중·장편소설 중 맥주가 나오지 않는 작품은 1편도 없다. “술은 모든 음식물 가운데 가장 흥이 나는 축제와 같다”(‘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거나 “위스키를 따르는 소리는 가까운 사람이 마음을 여는 듯한 소리”(‘기사단장 죽이기’)라는 소설 대사는 곧 하루키의 속마음이다. 신기한 것은 “매일 습관적으로 마시고 때론 만취하기도 하는데 ‘숙취’를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음악 = 소설가가 되기 전 재즈카페를 운영했던 그는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와 ‘포트레이트 인 재즈’라는 책을 내기도 했고, 여행을 떠나면 머무는 내내 중고 레코드숍을 찾아다니며 LP를 구한다. ‘무라카미 T’에서는 “레코드가 들어간 티셔츠가 있으면 대부분 산다”고 밝혔을 정도. 그는 주로 재즈 음반을 수집하지만, 평소엔 클래식부터 록까지 편식 없이 다양하게 듣는다. 심지어 해외 차트까지 꼼꼼하게 살피며 “귀가 노화되는 것을 방지하려 노력한다”(‘세일러복을 입은 연필’)고 한다. 그는 세상을 떠난 뮤지션을 소설로 부활시키기도 한다. 단편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는 1955년 사망한 천재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가 살아남아 음악을 했더라면? 이라는, 엉뚱하고 귀엽고, 또 고마운 하루키식 상상의 결과물이다.

◇여행 = 하루키는 그리스·로마 등에서 보낸 3년을 기록한 ‘먼 북소리’에서 자신을 ‘상주하는 여행자’라고 표현했다. 그에게 여행은 그저 잠시 짬을 내 일상을 잊는 ‘휴가’가 아니라 낯선 세계에 오래 머물며 새 일상을 구축하는 행위다. “지금 여기에 있는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나 자신이, 그리고 나의 행위 자체가 곧 여행”이라는 것이다. 그는 모국에서도 한곳에 3년 이상 거주하지 않는 ‘이사 중독자’기도 하다. 재즈 카페를 운영할 때도 ‘단골’이 생길 만하면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났다. ‘상주 여행’과 ‘이사 중독’은 “한곳에 안주하길 원치 않는, 벌판에 혼자 내동댕이쳐지는 상황을 즐기는”(임경선 작가) 하루키 성향을 대변한다. 무엇보다 이런 취미는, 해결되지 않은 사건의 비밀을 파헤치거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로드 무비’ 형식을 띠는 하루키 소설의 기본 골격과 조응한다.

◇야구 = 야구를 좋아하고 자주 보는 하루키는 야구장에서 전업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978년 4월 도쿄(東京) 진구구장, 2회 말의 그 순간을 그는 “하늘에서 뭔가 하늘하늘 천천히 내려왔다”(‘직업으로서의 소설가’)고 회고하는데, 이때 쓴 소설로 ‘군조’ 신인상을 받은 건 유명한 이야기다. ‘현현(顯現)’의 공간이 야구장이라니 참 ‘하루키스럽다’. 한신칸(오사카(大阪)와 교토(京都) 사이를 일컫는 말) 출신임에도 도쿄팀을 응원하는 이유, 약체인 야쿠르트 스왈로스를 응원하면서 패배에 대한 관대함을 얻은 것 등 그는 에세이에서 자주 야구에 대한 애정을 밝혀왔다. 특히 자전적 요소가 강한 짧은 소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은 그가 야구장에서 감각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담아냈다. “불어오는 바람을 피부로 느끼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팀이 이기고 있건 지고 있건, 나는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무한히 사랑한다.”

◇고양이 = 하루키와 함께 산 수많은 고양이 중 20년 이상 장수한 녀석은 딱 한 마리였다. ‘뮤즈’라는 이름의 그 암고양이는 특이하게도 새끼를 낳을 때면 언제나 주인 곁으로 다가왔다. 사람의 눈을 피해 어두운 곳에서 출산하는 다른 고양이들과 달랐다. 하루키가 뮤즈의 앞발을 잡아주면, 뮤즈는 발바닥으로 하루키 손을 꾹꾹 눌렀다. 하루키는 에세이집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서 “한밤중 몇 시간씩 마주하며 ‘고양이니 인간이니 하는 구분’을 넘어선 마음의 교류”를 느꼈다고 돌이킨다. 고양이를 향한 사랑은 소설에서도 잘 드러난다. ‘태엽 감는 새’는 고양이가 집을 나가면서 시작되고, ‘해변의 카프카’엔 고양이와 대화하는 능력을 지닌 할아버지가 나온다.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는 “엄마가 죽었을 땐 생각만큼 슬프지 않았다. 어릴 적엔 기르던 고양이가 죽었다고 그렇게나 울었는데도…”라고 말한다.

◇번역 = 레이먼드 챈들러, 스콧 피츠제럴드 등의 작품을 일어로 옮긴 하루키에게 ‘번역’은 직업의 일부지만, 그는 “여전히 ‘취미’라고 단언할 수밖에 없다”고 우긴다. “머릿속 언어 시스템이 쭉쭉 스트레칭하는 감각” “가로 문장을 세로로 일으켜 세울 때의 설렘” 자체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번역을 통해 다시 소설을 쓰는 힘을 얻기도 했다. ‘상실의 시대’가 초대박이 났을 때 그는 정신적 슬럼프에 빠져 한동안 소설을 쓰지 못했다. 대신 번역으로 지친 마음을 달랬는데, 어느 날 팀 오브라이언의 ‘뉴클리어 에이지’를 번역한 뒤 뼛속까지 스며 있던 냉기가 사라짐을 느꼈다. “내 존재를 증명하려면 계속 글을 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라는 인간이고,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이다.”

박동미·나윤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