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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호(1920∼2012)

눈이 부시게 청명한 날이면 문득 당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버님과 함께한 25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시집온 지 2년 뒤 함께 사시던 시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저는 아무 망설임 없이 혼자 계시는 아버님을 돌봐드려야 한다며 시골집으로 이사하게 됐지요. 그때 제 나이는 27세였으니 무슨 철이 들었겠습니까.

철없는 도시 며느리와 평생 시골에서 농사만 짓고 살던 아버님의 생활이 어찌 평탄하기만 했을까요. 풀 한 포기 뽑지 않는 며느리를 보고 “너는 네 방에 풀이 나면 베고 잘 아이구나”하시면서도 농사일은 당신의 몫인 양 묵묵히 감당하셨습니다. 아내를 암으로 잃고 남겨진 식구들을 책임지기 위해 굳은살이 박이도록 땅에 엎드려 일하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지요. 오직 자식을 생각하던 당신의 사랑은 ‘해바라기 사랑’이었습니다. 며느리 생일을 기억해 좋아하는 꽃게를 사 들고 터벅터벅 걸어오시던 모습, 며느리 힘들세라 손녀가 잠들 때까지 유모차에 태워 밀고 다니셨던 아버님.손수 농사지은 쌀로 만든 밥을 손녀들이 먹는 모습을 보고 뿌듯해하셨죠.

하지만 제 속엔 늘 두 개의 마음이 싸우고 있었지요. 잘해드려야겠다는 마음과 아버님과 함께하는 삶이 개줄에 묶인 강아지 같다는 답답함. 늘 세 끼의 식사를 챙겨야 한다는 것에 매여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주변 친구들은 홀가분하게 사는데 나만 왜 홀몸인 시아버지를 모셔야 하는가에 대한 불만. 항상 마음에 돌멩이 하나가 매달려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스무 살, 가난한 형편에 일본 징용을 다녀오신 뒤로 빈농 가장으로서 자식을 키우기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사셨는데, 그런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뇌경색으로 쓰러져 꼼짝없이 병원에 누워계실 때, 집 안 빈자리가 얼마나 썰렁해 보이던지요. 그 후 3년, 또 뇌출혈로 쓰러지시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셨지요. 유난히 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그때의 막막함, 참 부끄러웠습니다. 좀 더 잘해드렸더라면, 조금 더 웃는 얼굴로 대했더라면…. 당신이 원한 건 고작 따뜻한 말 한마디, 웃는 얼굴이었는데 잘하지 못했습니다. 아버님이 좋아하셨던 음식을 보면, 머리가 하얀 어르신을 보면 당신인 듯하여 가슴이 철렁합니다.

지금은 많이 그립습니다. 훗날 당신 앞에 선다면 얼마나 외로우셨느냐고, 얼마나 섭섭하셨느냐고 따뜻하게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그때는 제 마음이 너무 어렸노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 덕분에 마음 따뜻하게, 성실하게 살아왔노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며느리 유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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