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 = 권호영 기자

■ 한국어, 그 파란의 역사와 생명력 / 백낙청·임형택·정승철·최경봉 지음 / 창비
■ 나라말이 사라진 날 / 정재환 지음 / 생각정원

中의 위세·일제의 한글 말살에도 피땀으로 지켜낸 우리 문자
파란만장한 역사 속 한글의 끈질긴 생명력에 주목
구한말엔 F를 ‘ㅇㅍ’, V를 ‘ㅇㅂ’, L을 ‘ㄹㄹ’로 표기하기도

영어중심주의 등 현실속 한글 사용 문제점 극복하고
한국어 표기능력·표현력 극대화 위한 노력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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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 지붕 개량과 도로 정비 등 농촌 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시작된 새마을운동이 도시 지역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지금은 그리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여러 사업이 추진됐다. 당시 근검절약, 퇴폐 풍조 근절 등과 함께 고운 말 쓰기 운동도 펼쳐졌다. 이때 사투리도 추방 대상에 포함됐다. ‘표준어’가 아닌 사투리는 ‘다른 말’이 아닌 ‘잘못된 말’ ‘쓰지 말아야 할 말’로 간주했다. 정승철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사투리를 쓰면 창피한 것이고 전근대적인 것이라고 한 것”이라며 “언어규범화의 가장 큰 문제는 사투리에 모멸감을 안긴 것”이라고 비판했다.

1990년대 이후 지방자치단체의 지역 사투리 보전 노력, 영화나 드라마의 영향 등으로 사투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희석됐다. 하지만 사투리 근절 운동은 언어에 대한 편협한 접근이 어떤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과거 식민지 시절 일제의 악랄하고 철저했던 조선어 말살 정책, 그보다 앞선 조선 시대 식자층의 한글 경시 풍조만 탓할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574돌 한글날(10월 9일)에 즈음해 출간된 좌담집 ‘한국어, 그 파란의 역사와 생명력’(창비, 256쪽, 1만6000원)에는 이런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고 보다 풍요롭고 품격 있는 ‘말글살이’를 누리기 위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할 화두들이 담겨 있다. 문학평론가이자 출판 편집인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고전 연구자이자 한문학자인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 방언학자인 정 교수, 국어사전학자인 최경봉 원광대 교수 등 좌담에 참여한 4명의 학자는 근대 전환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어의 역사를 되짚음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저자들은 우선 한국어가 중국이라는 강대국의 위세와 일제의 식민지배 등을 거치면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은 파란만장한 역사에 주목한다. 대한제국 말기 주시경·지석영·이능화 등이 참여한 국문연구소의 문법 및 맞춤법 확립 노력,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의 우리말 사전 편찬과 표준어 사정, 이태준·이광수·김동인 등 당대 문필가들의 노력 등이 끊이지 않고 이어짐으로써 해방 후 온전한 국어 생활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지식인들이 주도한 일방적인 언어규범화와 권위주의 정권의 엄격한 국어순화운동, 한글전용론 팽배 경향이 극단적인 방언 멸시와 무조건적인 한자 배제 등 무시할 수 없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게 저자들의 판단이다. 편의성을 명분으로 ‘옳은 말’과 ‘틀린 말’을 표준어를 기준으로 나누거나, 국한문 병용이라는 중도적 해법을 배제한 채 한글전용 일변도로 나아갔다는 지적이다.

저자들은 ‘코먼스(commons)’, 즉 ‘공동영역’으로서 한국어를 보다 풍부하게 가꿔가기 위한 제안도 내놨다. 백 교수는 현행 표준어 규정에 깃든 행정편의주의·영어중심주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한국어의 표기능력과 표현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토론을 제안했다. 가령 구한말 일부 책에서 영어 ‘P’와 ‘F’ 발음을 각각 ‘ㅍ’와 ‘ㅇㅍ’로, ‘B’와 ‘V’를 ‘ㅂ’와 ‘ㅇㅂ’로, ‘S’와 ‘Z’를 ‘ㅅ’와 ‘ㅇㅅ’로, ‘R’와 ‘L’을 ‘ㄹ’과 ‘ㄹㄹ’로 표현한 것을 참고하면 보다 원음에 가깝게 표기할 수 있다는 얘기다. ‘파리’를 ‘빠리’로, ‘이탈리아’를 ‘이딸리아’로 표기하는 등 외국 인명이나 지명 표기 때 ㄲ, ㄸ, ㅃ, ㅆ, ㅉ 등 된소리를 쓰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 교수는 ‘방언사용권’이 존중되는 사회로 나아갈 것을, 최 교수는 ‘공통어’의 범위를 확장할 것을 주장했다. 임 교수는 인문적 심성에 기반한 비판 정신을 길러줄 수 있는 다산 정약용의 공부법 ‘문심혜두(文心慧竇)’를 국어교육의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했다.

방송인 출신 역사학자이자 한글 사랑 운동가 정재환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가 쓴 ‘나라말이 사라진 날’(생각정원, 272쪽, 1만5000원)은 조선어를 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탄압과 이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 조선어학회의 처절한 투쟁사를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특히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의 전모를 깊이 있게 추적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극로·이윤배·최현배·이희승 등 33명의 구속과 처벌로 이어진 이 사건은 ‘오늘 국어를 썼다가 선생님한테 단단히 꾸지람을 들었다’고 쓴 한 여학생의 일기 한 줄에서 시작됐다.

당시 다른 사건으로 이 여학생의 일기장을 우연히 입수한 조선인 경찰관 야스다(본명 안정묵)는 애초 국어(일본어)를 쓴 여학생을 혼낸 교사를 잡아들이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알고 보니 일기에 나온 국어는 일본어가 아닌 조선어였다. 그러자 일제 경찰은 ‘조선어를 국어라고 생각하게 한 교사를 처벌하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결국 전 영생여학교 교사이자 조선어학회 회원인 정태진이 붙잡히면서 회원들도 줄줄이 검거됐다.

저자는 “언어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이루는 뿌리인데, 그 뿌리가 짓밟혔던 치욕스러운 과거, 그리고 그 뿌리를 되살리고자 버티고 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르고서야 어찌 뿌리에 기대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는 일이 가능할까”라며 출간 배경을 설명했다.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