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1968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나선 로버트 F 케네디가 파인리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고아 소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왼쪽 사진), 미시시피 삼각주 지역 빈민촌에서 흑인 어린이들의 실태를 살펴보는 모습. 모던아카이브 제공

■ 라스트 캠페인 / 서스턴 클라크 지음 / 박상현 옮김 / 모던아카이브

68년 인종차별로 전역서 폭동
현재의 美 정치현실과 닮은꼴

대선출마 선언부터 암살까지
‘로버트 케네디의 82일’조명

극단정치·포퓰리즘에 맞서
공동체에 대한 책임 강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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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매체다. 상품이기도 하다. 아무리 풍부한 정보와 훌륭한 메시지를 담았어도, 잠재적 독자의 필요와 욕망(needs)에 부응하지 못하면 선택받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새로 출간된 ‘라스트 캠페인’은 ‘왜 지금, 이 사람을…’이라는 의문을 품게 했다. 아무리 미국 대통령 선거가 두 달 앞으로 다가왔기로서니 50년도 더 지난 1968년 미국 대선을, 그것도 본선도 아닌 민주당 후보 경선 도중 비운의 삶을 마감한 로버트 F 케네디의 선거운동 과정을 돌아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책장을 몇 장 넘기기도 전에 이런 의문은 사라졌다. 대선 출마 선언부터 암살에 이른 로버트 케네디의 ‘마지막 82일’은 지금 이 시점에도 다시 소환할 가치가 충분해 보였다.

우선 1968년과 2020년이 놀라우리만큼 닮았다. “1968년 미국은 상처 입은 나라였다”는 저자의 첫 문장은 연도만 바꾸면 2020년에도 그대로 들어맞을 듯하다. 전 세계적으로 약 400만 명의 희생자를 낸 홍콩 독감은 미국도 강타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이라는 끝 모를 수렁에서 허우적대면서 대학가는 극심한 반전 시위에 휩싸였다. 4월 4일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백인의 총격에 사망한 것을 계기로 인종차별과 불평등에 억눌려 있던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가장 큰 파괴를 겪어야 했다. 킹 목사 사망 후 하루 동안에만 119개 도시에서 폭동이 발생해 46명이 사망하고 2500명이 다쳤다. 수도 워싱턴DC에서도 연방군이 무장한 채 주요 시설을 지켜야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창궐, 백인 경찰에 의한 비무장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으로 한층 고조된 흑·백 갈등, 양극화와 극단주의의 득세 등으로 얼룩진 2020년 현재 미국의 모습은 52년의 시차를 둔 평행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책을 읽으면서 미국이 1968년에 멈춰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는 번역자의 말처럼, 52년 전 풀지 못한 숙제가 현재의 공동체 붕괴 위기로 이어졌음을 짐작게 한다.

비록 백악관으로 가는 길을 총(銃)이 가로막았지만, 로버트 케네디의 선거운동은 “국가가 도덕적 위기에 처했을 때 대선후보가 어떤 방식으로 선거에 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 같은 사례”이기도 했다. 사실 로버트 케네디의 친형인 존 F 케네디가 1960년 대선에서 TV토론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적극 활용해 당선된 이래 미국 정치는 떠들썩한 행사와 감동을 자아내는 연출 등이 지배하는 ‘이미지 정치’의 시대로 넘어갔다. 저소득층과 흑인, 히스패닉 등 소외계층이 분노를 쏟아내고 있음에도, 민주당 경선 후보들조차 베트남전과 빈부 격차 등 당면 현안에 대해서는 전략적 모호성을 견지하면서 근거 없는 장밋빛 미래만 약속했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미군이 베트남에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한 것을 지적하면서 “수백만 명을 난민으로 만들고 여자와 아이들을 죽였는데 … 우리한테 그런 권한이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베트남 전장에서 죽어간 미군 가운데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원입대한 흑인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도 지적했다. “득표에 도움 될 게 없다”는 참모들의 만류에도 미시시피 삼각주 오두막에서 굶주리는 흑인 어린이들, 파인리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살아가는 어린이와 주민을 만나기 위해 달려갔다. 캔자스, 인디애나, 사우스다코타 등 흑·백 갈등이 유독 극심했던 지역의 백인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부자는 더 부유하게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되는” 상황을 방치해선 안된다고 호소했다. 단지 ‘불편한 진실’만 얘기한 게 아니다. 입버릇처럼 “미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국민 개개인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유권자를 향해 미국, 나아가 세계인의 비참한 현실을 미국인의 불명예로 여길 것, 아울러 단순히 투표만 하지 말고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느낄 것을 촉구한 로버트 케네디의 정치철학을 그의 연설문을 담당했던 제프 그린필드는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타인의 목을 밟고 있는 당신의 발을 치우라!”

저자는 로버트 케네디에 대한 뜨거운 추모 열기에 대해 “그들(미국인)이 상처 입은 나라를 치유하고 더러워진 명예를 회복시켜 줄 지도자를 간절히 바랐고, 다시금 숭고한 정신을 느낄 수 있기를 절실히 바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포퓰리즘과 극단의 정치가 횡행하는 지금, 수십 년 전 국민의 정신을 고양시키려 했던 한 정치인의 이야기가 여전히 의미를 갖는다는 얘기다. 440쪽, 2만2000원.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