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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흥(1936∼2020)

“바나나, 맛없다!”

아버지는 출근길에 밤새 마루에 놓여 있던 과일바구니를 들고 나가시며 툭 던지듯이 내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는 과일바구니, 그 안의 바나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거봐라, 어제 저 바나나 먹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그랬다. 전날 낮에 누군지 모르는 아저씨는 손사래를 치는 어머니를 밀치며 마루 위에 과일바구니를 놓고 휭하니 사라졌고, 퇴근 후 그 사실을 안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출근길에 다시 그 과일바구니를 들고 나가셨다. 바나나를 처음으로 먹어볼 수 있겠다는 나의 바람은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함께. 물론, 그 바구니 밑에 뇌물성 돈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뭐? 소설을 쓰겠다고? 김유정처럼 불행하게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그만둬!”

소설과 연극에 정신이 팔려 있던 청소년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대학교 백일장에서 받은 상장과 부상을 마당에 던지며 아버지는 내게 소리치셨다. “내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온 건, 너 하나 제대로 공부시키려고…. 그런데 뭐? 글쟁이가 되겠다고?” 나름대로 강원도의 명문으로 알려진 춘천고를 졸업하고도 소 한 마리 값인 등록금이 없어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아버지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집안의 어른이면서 소설 때문에 불운하게 요절한 소설가 김유정에 대한 흔적은 아들의 수상 기쁨을 깨트리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그때 강남으로 이사 갔으면 지금쯤 극장 있는 건물 하나 지어줬을 텐데….”

그놈의 부동산은 예나 지금이나 없는 자의 설움을 흔들어대는 애물단지인가 보다. 그토록 반대하던 아들이 기어코 연극인이 됐지만, 공연할 극장 하나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던 아버지는 어느 날 술의 힘을 빌려 추억을 끄집어내셨다. 고향 춘천을 떠나 어렵게 자리 잡은 서울 삼양동 판자촌의 생활도 잠시. 그곳이 재개발되면서 마땅히 갈 곳이 없어 고민하던 아버지에게 후배 직원이 말했다. 보상금으로 강남에 가면 허름하지만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고. 그 말에 셋방 설움을 벗어날 수 있겠다는 기대와 함께 찾아간 강남의 잠실 배추밭, 그리고 그 한가운데 띄엄띄엄 쓰러질 듯 서 있는 집들. 그때 아버지는 후배 직원에게 벌컥 화를 내시며 말했다. “차라리 판자촌이 낫겠다!”

“고맙다, 고마워.”

올해 들어 갑자기 기력을 잃어가던 아버지는 내 아내, 며느리를 볼 때마다 말씀하셨다. 고맙다고. 그때 나는 그저 속 썩이던 막내 손주 녀석이 좋은 대학에 입학해서 그런 말을 하시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지셨다는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찾아뵌, 돌이켜보면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그날 아버지는 나를 보고 그저 이 말만 반복하셨다. “미안하다, 미안해. 미안하다.” 아버지는 마지막 가시는 길에 무엇이 그리 아들한테 미안하셨을까? 바나나 때문에? 예술을 때려치우라고 한 것 때문에? 강남 배추밭에 극장을 지어주지 못한 것 때문에?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이제야 나는 내게 묻는다. 미안하다는 그 말의 뜻을 아느냐고. 하지만 내게 돌아오는 대답은 미안하다는 아버지의 그 말 한마디, 그 말이 너무 아프다는 사실뿐이다. 미안하다는 그 말이….

아들 김혁수(강원도립극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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