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몰리에르와 륄리의 오페라 ‘중산층 귀족’의 한 장면. 주인공 주르댕이 신분 상승을 위해 귀족들에게 아부하고 있다.

■ 김학민의 오페라 문화사 - (11) 프랑스 코믹 오페라

佛은 해학·세태풍자 등 ‘파르스’의 전통… ‘장터극’은 무대위 대화·노래 금지당하자 무언극·동물출연으로 버텨

천재작가 파바르 작품들 인기에 철학자 볼테르는 감사편지도… 국왕의 인정 받고 정식 극장까지 얻어

이미지 크게보기 초창기 코믹 오페라 작가였던 샤를 시몬 파바르. 기존 오페라의 줄거리와 인물을 희화화해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세상 비판과 천진한 놀이의 경계선에서 이뤄지는 줄타기는 더 나은 세상을 열망하는 예술가의 승화된 경지이다. 예로부터 프랑스 예술가들은 현실과 예술의 미묘한 접점에서, 웃음을 활용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이들은 현실을 직접 맞닥뜨리지 않고 은근히 비꼬는 조롱의 형식 안에,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의 칼날을 감췄다.

19세기 중후반 프랑스 작곡가 오펜바흐(1819∼1880)는 오페라 부프 ‘지옥의 오르페’(1858)와 ‘아름다운 엘렌’(1864)을 통해 특유의 해학과 풍자 수법으로 각기 오르페오 신화와 트로이 전쟁 신화를 뒤틀었다. 오펜바흐는 이를 통해 그가 살던 나폴레옹 3세 시절(제2 제정기:1852∼1870) 파리 부호들의 도덕적 문란함과 속물성, 썩은 정치판의 세태를 노골적으로 꼬집었다. 파리 검열 당국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1857)에 가차 없이 판금 조처를 내렸으나, 이상하게 오펜바흐의 작품들은 판금에서 제외해줬다. 워낙 재미있는 데다 소재도 현실에서 동떨어져 해롭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르놀트 하우저 1951, 번역판 2016, 122∼126)

◇프랑스적 웃음의 전통, 파르스

심각한 내용을 살짝 비틀어 만드는 프랑스적 웃음의 묘미는 이들의 오랜 희극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중세 종교극에서 유래한 ‘파르스’(笑劇)는 시사성 있는 이야기를 슬랩스틱과 즉흥연기, 양식화된 몸짓으로 전개해 인기를 누렸다. 종종 거리의 노래 보드빌(유행가)과 춤을 곁들여 재미를 더했다. 익명의 작가가 쓴 ‘파틀랭 선생의 소극’(1457)은 돌팔이 변호사와 아내가 의류상과 양치기에게 술수를 부리다 법정에서 진실 공방을 벌인 끝에 망신당하는 이야기로, 정직함의 미덕이 사라지는 당시 사회상을 예리하게 꼬집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코믹 오페라

파르스의 정신은 바로크 시절 국왕의 후원을 받은 고품격 오페라에 영향을 미쳤다. 루이 14세와 15세가 통치하던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음악 비극과 더불어) 발레와 음악을 한데 결합한 고품격 코믹 오페라가 공연됐다. 최초의 예인 ‘중산층 귀족’(1670, 몰리에르 대본, 륄리 작곡)은 신분 상승을 꿈꾸는 중산층 중년 남자(주르당)의 속물 행태를 희화화해 루이 14세와 그가 초대한 귀족들에게 한바탕 웃음을 선사했다. 주인공이 귀족행세를 위해 발레와 연극, 철학 수업을 받는 일련의 모습은 언뜻 무해한 웃음거리로 보이지만, 그 안에 은폐된 세태 풍자와 비판의 칼날은 순수예술과 풍자예술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묘한 매력을 풍긴다.

다음 세기인 루이 15세 시절 베르사유 궁전에서 초연된 ‘플라테’(1735, 라모 작곡)는 신들의 왕 주피터가 개구리 님프(플라테)와의 위장결혼식으로 아내인 주노 여신의 질투 버릇을 고친다는 엉뚱한 소재로 돼 있다. 이 작품은 표면상으로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철저히 믿는 개구리 님프(서민을 상징)를 조롱하는 듯하지만, 조롱의 은근한 칼날은 시도 때도 없이 여자를 탐하는 주피터와 남편에게 질투의 패악을 쏟아붓는 주노 여신(통치자를 상징)을 향했다. 하지만 조롱의 방향이 워낙 애매했기에, 당시 베르사유 궁전의 왕과 귀족들은 아무 생각 없이 우아한 발레와 노래로 된 코미디를 즐겼다. 당시 사람들은 이 오페라들을 희극과 발레를 섞었다는 의미에서, ‘코미디 발레’(륄리) 혹은 ‘발레 부퐁’(라모)이라 불렀다.

이미지 크게보기 상 로랭 정기시장에서 거행된 장터 오페라로 유서 깊은 코믹 오페라의 기원이 됐다.

◇센강 주변의 장터 오페라

하지만 프랑스 코믹 오페라의 진정한 탄생은 궁전이 아니라 시장바닥에서 이뤄졌다. 중세 시절부터 파리의 센강 주변에는 매년 두 개의 정기 시장(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열린 상제르망 시장과 초봄에 열린 상 로랭 시장)이 열렸는데, 물건 파는 진열대 옆에 가설무대를 세워 야외 공연을 올렸다. ‘장터극’(drame forain)이라 부른 이 공연은 세태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이야기에 노래와 춤을 섞은 일종의 소박한 오페라로, 장터를 찾는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장터 오페라는 제도권 오페라처럼 격식을 따질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궁전 오페라의 거추장스러운 허울과 가식을 벗어던졌다. 왕의 춤인 발레의 굴레도 벗었고 굳이 음악적 완결성을 위해 노래만 부를 필요가 없었으니, 연극처럼 생생하고 즉흥적인 대사 장면을 섞어 자연스러움을 살렸다.

17세기 후반 이후 센강 주변 장터 오페라의 인기는 제도권 오페라와 제도권 연극을 위협했다. 장터극의 번창은 급기야 국왕 직속 오페라단인 왕립음악아카데미(오늘날의 파리 오페라단)와 국왕 직속 연극단체인 코미디-프랑세즈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국가가 공인한 오페라와 연극의 품격을 떨어트린다는 표면적 이유 뒤에는 자신들의 공연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것에 대한 괘씸한 마음이 숨어있었다. 두 국가 단체는 꼼수를 부려 이상한 칙령을 발표했다. 무대 위에서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대화 금지법’(코미디-프랑세즈)과 ‘노래 금지법’(왕립음악아카데미)이 그것이다. 곡예와 독백 연기나 하든지 아니면 문을 닫으라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에, 장터극의 흥행주들과 예술가들은 분개했다.

장터의 거친 생명력은 제도권 행정가의 잔꾀보다 강했다. 장터극 사람들은 꾀를 모아 오페라 공연을 계속할 방법을 찾았다. ‘대화 금지법’을 피해가기 위해 무대 위에 한 명의 배우만을 세워 독백과 무언극으로 공연하거나, 말 없는 역을 등장인물로 세우는 궁여지책을 쓰기도 했다. 심지어 동물까지 등장했고, 프랑스어 대사를 피하고자 라틴어 느낌의 사투리를 쓰기도 했다. 한편 ‘노래 금지법’을 피하기 위해서는 관객들에게 가사가 적힌 종이를 배포해 배우 대신 노래를 부르도록 하고, 배우들이 노래하지 않음을 강조하려고 입에 재갈을 무는 촌극도 벌어졌다.(Mordden 1980, 51∼2)

◇오페라 코미크

결국, 제도권은 장터극의 야외오페라 공연에 백기를 들었다. 1715년, 장터극 흥행주들이 매년 일정 금액을 사용료로 지급하기로 합의하면서, 대화 및 노래 사용 허가를 받아낸 것이다. 꾀바른 노력 끝에 공연 허가를 받아낸 장터극의 흥행주들은 자신들의 오페라 공연무대를 ‘오페라 코미크 극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오페라 코미크의 역사가 정식으로 열렸다.(Grout 1958, 308∼10)

장터에서 거칠게 태어난 오페라 코미크는 왕의 권력에 길든 궁전 오페라와는 태생이 달랐다. 음악 비극(트라제디 리리크)으로 대변되는 륄리, 라모의 오페라가 영웅과 신화의 세계에 머무른 제도권 예술이었다면, 오페라 코미크는 보통 사람들의 건강한 삶을 재료로 한 대중 예술이었다. 오페라 코미크는 이탈리아의 유사 장르였던 오페라 부파처럼 처음에는 저급한 슬랩스틱과 상스러움, 값싼 취향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세련되게 다듬어졌다. 기존의 유행가 선율에 가사만 바꾸던 초기 관습(‘보드빌로 된 코미디’)은 새로 작곡한 정식 노래로 바뀌었고(‘샹송 코미디’ 혹은 ‘아리에트 코미디’), 인물의 입체성과 이야기의 사실성을 보강했다.

◇파바르의 희화화 전략

르네 르 사주(1668∼1747)에 이어 재능있는 유명 작가, 샤를 시몬 파바르(1710∼1792)는 오페라 코미크의 인기와 수준을 한 차원 높였다. 파바르는 이야기 창작뿐 아니라, 연출, 디자인, 캐스팅 등 모든 걸 관장했다. 그의 요염한 아내, 마리 쥐스틴 본과 뒤롱세레는 남편의 대본 작업과 제작과정을 보조했을 뿐 아니라 여배우, 무용수, 가수로 무대에 섰다. 파브르가 무대 위에 창조해낸 ‘감상적이고 소박한 로맨스’는 아내와 장군의 불륜 스캔들의 투영이었다.(Mordden 1980, 53)

파바르의 강점은 감상성과 대중성이었다. 패러디의 달인이던 그는 당시 궁전 오페라 속 영웅과 신들의 이야기를 보통 사람들의 통속물로 변형시켰다. 청중은 원 오페라에 나오는 고상한 인물들이 희화화되는 모습을 보며 배꼽을 잡았다. 그가 남긴 수많은 오페라 코미크는 오늘날 뮤지컬처럼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서민들의 기쁨이 돼주었음에 감동한 철학가 볼테르는 그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1775년, Mordden 1980, 53)

그의 ‘춤추는 인도’(1751)는 라모의 오페라 발레, ‘우아한 인도’(1735)를 패러디한 것으로, 무대 위 발레리나들의 우아한 몸짓과 무겁고 고상한 궁전 음악을 희화화해 관객들을 웃겼다. ‘아를르캥-다르다누스’(1739)는 라모의 음악 비극 ‘다르다누스’(1739)의 패러디로,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익살스러운 시종 역인 아를레키노의 이야기와 신화 속 영웅 다르나누스의 이야기를 하나로 섞었다. ‘바스티앙과 바스티엔의 사랑’(1753)은 계몽주의 철학가 장 자크 루소(1712∼1778)가 대본과 작곡을 모두 맡으며 야심 차게 발표한 ‘마을의 점쟁이’(1752)의 패러디였고, ‘이폴리트와 아리시’(1742)는 같은 제목으로 된 라모 오페라(1733)의 패러디였다. 패러디 전략은 이탈리아 오페라에도 적용됐다. 페르골레시의 ‘마님이 된 하녀’(1833년 초연, 1846, 1852년 파리 순회공연)를 희화화한 ‘정부(情婦)가 된 하녀’(1755)는 레치타티보 대신 프랑스어 대사를 사용해 파리 청중에게 더 큰 웃음을 선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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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코미크의 예술가들은 숙원사업이던 정식 극장을 얻으며 가설무대를 떠날 수 있었다. 오텔 드 부르고뉴(1762∼1783), 파바르홀(1783∼1838, 1840∼1887) 등을 거점으로 한 이들의 노력에 감동한 왕(루이 16세)은 1780년 이 단체를 공식 오페라단으로 인정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장터에서 미미하게 시작된 소박한 서민 오페라가 프랑스 최고 오페라단(파리 오페라단)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현재 이 단체의 거점인 2차 파바르 홀(1898년 개관)은 두 번에 걸친 화재 끝에 다시 세운 건물로, 오페라 가르니에 극장이 있는 이탈리안 대로(大路) 근처, 보옐디외 구역에 있다.

경희대 연극영화과 교수


■ 용어설명

오페라 부프 : 19세기 중후반 프랑스에서 유행한 코믹 오페라의 일종. 독일과 영국 등으로 확산되면서 오페레타(작은 오페라)라 불리기도 했다.

오페라 코미크 : 프랑스어로 된 코믹 오페라의 총칭으로, 파리 정기 시장에서 소박하게 시작해 바로크 시절부터 19세기 낭만주의 시절까지 긴 역사에 걸쳐 발전을 거듭했다.

코미디 이탈리안 : 이탈리아의 순회 오페라 공연에서 시작된 파리의 이탈리아 공연단.

부를레스크 : 기존 작품을 패러디한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모방극으로, 오늘날 뮤지컬의 모태 중 하나인 ‘벌레스크’에 해당하는 프랑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