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박세리가 1998년 US여자오픈 플레이오프 18번 홀 두 번째 샷을 개울에 두 발을 담근 채 탈출하는 장면(왼쪽)이고, 우승 트로피를 안고 환한 미소를 짓는 모습. USGA 홈페이지 캡처.

18번홀서 날린 드라이버샷
훅 걸리며 개울가 옆 떨어져
물에 들어가 투혼 샷 ‘감동’
결국 20번째 홀서 버디우승

1998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메이저대회인 제53회 US여자오픈이 열린 위스콘신주 콜러의 블랙울프런 골프클럽. 월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부터 갤러리가 운집했다. 전날까지 4라운드 72홀을 돌면서 우승자를 가리지 못해 이날 아침 7시부터 치러지는 18홀 플레이오프를 보기 위해 새벽부터 몰려들었던 것. 눈에 띄는 것은 시카고에서 온 한국 교포들이었다.

연장전에서 태국계 미국인 제니 추아시리폰, 그리고 박세리가 맞붙었다. 둘은 당시 모두 20세였다. 박세리는 LPGA투어 신인이었고, 추아시리폰은 듀크대 재학생인 아마추어였다. 전날 4라운드 출발 때까지 박세리가 중간합계 1오버파로 선두였지만 5타를 잃었고, 5오버파로 출발했던 추아시리폰은 2타를 잃고 가다 마지막 18번 홀에서 극적으로 버디를 챙겨 공동선두가 됐다.

이미지 크게보기 이인세 골프역사칼럼니스트

연장전에서 추아시리폰이 1, 2번에 이어 5번 홀 버디로 압도했다. 박세리는 3번 홀 보기로 4타 뒤져 패색이 짙었다. 하지만 추아시리폰이 6번 홀(파3)에서 트리플보기로 3타를 잃어 1타 차로 좁혀졌다. 전반에 2타를 뒤진 박세리는 11번 홀부터 뒷심을 발휘, 14번 홀까지 버디 3개를 뽑아내 1타 차로 앞섰다. 박세리가 15번 홀 보기로 다시 동타. 이후 17번 홀까지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마지막 18번 홀(파4) 티잉 구역에 둘이 동시에 올라왔다. 박세리가 먼저 드라이버를 잡고 쳤다. 하지만 훅이 걸리면서 공은 왼쪽 개울가 언덕 밑으로 떨어졌다. 개울 위의 둔덕 풀숲에 떨어진 공은 물에 빠지지 않았지만, 정상적으로는 걷어내기가 힘들었다. 벌타를 먹고 드롭해야 할 상황이었다. 순간 갤러리들이 놀라며 웅성댔다. 페어웨이를 서너 번 오가던 박세리가 신발을 벗기 시작했기 때문. 박세리의 하얀 발이 구릿빛으로 변한 다리와 대조를 이뤘다. 개울에 두 발을 담근 박세리는 그렇게 공을 페어웨이로 쳐냈다. 박세리는 3온 2퍼트 보기로 먼저 마쳤다. 이겼다고 생각했던 추아시리폰은 파 퍼트를 놓쳤다. 72홀에다 18홀 플레이오프에서마저 동타가 돼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연장 19번째 대결. 이제부터는 서든 데스. 1타라도 앞서면 이긴다. US여자오픈 사상 처음 있는, 가장 긴 연장전이 됐다. 갤러리는 숨을 죽였다. 둘은 10번 홀(파5)로 이동했다. 연장 19번째 홀은 사이좋게 보기. 연장 20번째 홀에서 둘은 페어웨이에 공을 안착시켰다. 박세리가 홀 5m 남짓 거리에 붙여 버디 기회를 잡았다. 추아시리폰은 그보다 먼 거리의 퍼트를 시도했지만, 홀 1m 이내에서 멈췄다. 박세리는 망설이지 않고 강하게 공을 쳤고 공은 홀로 들어갔다. 박세리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장장 92홀의 승부가 끝났다.

박세리와 추아시리폰의 연장 혈투는 골프사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이 됐다. US오픈은 물론 메이저대회 최장 연장 승부였다. 지금은 메이저를 포함해 모든 대회가 월요일 18홀 연장전을 없앴기에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영구기록이 됐다.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US여자오픈 정상에 오른 박세리는 두 달 전 맥도날드 LPGA챔피언십에서도 우승했다. 한 해에 두 차례 메이저대회 우승을 차지하며 일약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추아시리폰은 이후 필드에서 사라졌고, 간호사의 길로 들어섰다. 새벽부터 TV를 시청하던 대한민국에서 함성이 터졌다. 외환위기라는 암울한 상황에서 국민에게 힘을 준 박세리의 맨발 투혼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골프역사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