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배우 김영철이 ‘동네 한 바퀴’를 진행할 때처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골목길을 걸으며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김낙중 기자

■ ‘동네 한 바퀴’로 정감 전하는 배우 김영철

낯선 동네 찾아 사람들 인터뷰
대본 없이 즉석에서 현장 전해

王·형사 등 많은 배역 했지만
아직 의사 역할은 맡은 적 없어
의사 같아 보이지 않았나 봐요

얼마전 뉴욕 사는 아들이 편지
‘아버지 존경스럽다’처음 전해

“좋은 배우보다는 먼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배우 김영철(67)을 가장 최근에 만난 게 약 2년 전이었다. 2018년 7월의 어느 날, KBS 1TV에서 정규편성되기 직전의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던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를 보다가 갑자기 ‘촉’이 와서 인터뷰했다. 익숙한 서울 도심 거리를 걸으면서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는 단순한 포맷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끌렸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거리를 ‘걷는’ 속도로 보여주니까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게 신기했다. 더구나 푸근한 인상에 넉넉한 음색의 김영철이 앞장서니 절로 믿음이 갔다. 기자처럼 느낀 시청자가 많았던 모양이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는 결국 정규방송으로 편성됐고, 지난달 25일 ‘속초’편으로 70회를 맞았다.

“하루 종일 촬영에 평균 걷는 거리가 10∼12㎞는 된다”고 했으니 그동안 전국팔도를 700㎞ 이상 누빈 셈이다. 김영철이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시청률은 차곡차곡 쌓였다. 최근엔 평균 시청률이 8% 안팎. 같은 시간대 인기 예능인 MBC ‘놀면 뭐하니?’나 SBS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뒤지지 않는다. “뭘 쑥스럽게 인터뷰를 또 하느냐”며 손사래 치던 그를 겨우 설득해 지난달 말 개인 유튜브 방송 촬영을 하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사무실에서 다시 만났다.

“‘한국인의 밥상’처럼 또 하나의 장수 프로그램이 나온 것 같다”고 덕담을 건네자, 그는 옛 드라마 ‘태조 왕건’(2000) 속 궁예처럼 껄껄 웃으며 답했다. “‘한국인의 밥상’이 이제 10년 가까이 됐다. 최불암 선배가 존경스럽다. 나도 그런 프로그램처럼 오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의 매력은 아무래도 김영철 개인이 가진 긍정의 이미지에서 비롯한다. 골목길을 누비며 서민들과 부딪치는 소박함, 작은 것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 섬세함, 누구든지 금방 웃으며 소통하는 친근함, 그리고 일상에서 새로움을 찾아내는 재발견에 있다.

“처음엔 내가 어떤 동네에 찾아가면 ‘궁예’ ‘김두한’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오셨네’라고 해주신다. 지난달 촬영지가 춘천이었는데 두 번째 방문이었다. 처음 갔을 때 들렀던 세 자매 막국수 집이 어떤가 궁금해 가봤는데 장사가 더 잘되고 있더라. 보람과 책임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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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상대를 배려하고 공감하는 모습에서 김영철의 진가가 드러난다. 그는 이 프로그램 전에는 그 흔한 예능에 출연한 적도 별로 없다. 그런데 낯선 곳에서 처음 만나는 상대와 금방 동화돼 구수한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인터뷰 대본 같은 건 따로 없다. 현장감을 생생히 전달하는 것이다.

“인터뷰는 대부분 즉흥적으로 한다. 마음에 와 닿거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바로바로 물어보고 확인한다. ‘동네 한 바퀴’를 하면서 방송하는 스킬이 제법 많이 늘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인터뷰는 즉석에서 해야 제맛 아닌가. 하하.”

요즘 젊은 세대는 김영철을 ‘동네 한 바퀴’의 진행자나 햄버거 TV CF의 모델로 기억한다. 학생들이 주요 고객인 햄버거의 CF는 지난해 부쩍 높아진 인기에 힘입어 찍은 것이다. 햄버거 세트를 주문한 김영철에게 점원이 “가격은…”이라고 하자, 다짜고짜 “사딸라”를 외친다. “이러면 안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사딸라”만 반복한다. 진지한 표정으로 “사딸라”를 외치는 모습이 화제를 모으며 김영철의 별명은 ‘사딸라 아저씨’가 됐다. 그러나 “사딸라”는 그가 2003년 출연했던 드라마 ‘야인시대’ 속 김두한의 대사였다. 미군과의 임금협상에서 기존의 1달러 대신 4달러를 내놓으라며 버티는 대목에 들어 있다. CF와 똑같다.

“당시 햄버거 CF 촬영이 40분 만에 끝났다. 대형버스 분장실에서 분장한 시간도 그보다는 길 텐데 정작 촬영은 금세 마무리됐다. 너무 금방 끝나서 이렇게 해도 되는 거냐고 내가 오히려 걱정했을 정도다.”

김영철은 그동안 선 굵은 연기자의 표상이었다. 1973년 민예극단, 1977년 TBC(동양방송) 공채 연기자 출신인 그는 KBS 1TV ‘TV문학관’의 단골 주연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2000년대 들어 ‘태조 왕건’에서는 궁예 역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옴마니 반메훔” “짐은 미륵이니라” “관심법” 등의 대사는 지금도 인터넷에서 패러디되며 ‘역주행’ 인기를 누리고 있다. 대사할 때의 독특한 억양과 발성에 듣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는 이 역할로 주연인 왕건(최수종)을 제치고 그해 KBS 연기대상을 거머쥐었다.

‘야인시대’ 김두한 이후 2005년엔 영화 ‘달콤한 인생’으로 또 한 번 관객을 사로잡았다. 마지막 하이라이트 신에서 이병헌과 마주 서서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라고 하는 부분이다. 이 말 역시 지금까지 예능에서 패러디되는 명대사로 남아 있다.

그 뒤로 2011년 KBS 2TV ‘공주의 남자’의 수양대군, 2016년 MBC 주말극 ‘가화만사성’의 가부장적 아버지, 2017년 KBS 2TV ‘아버지가 이상해’의 헌신적 아버지까지 비정한 조직 세계의 보스와 ‘국민 아버지’를 오가며 빼어난 연기를 보여줬다. 하지만 그는 연기 방법에 대해 함부로 말하거나 후배에게 쉽게 조언하지 않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노력과 겸손의 가치를 깨닫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현장에서 내 위주로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서 드라마와 영화는 혼자서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걸 절실히 느낀다. 우리는 소중한 일을 하고 있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귀중한 존재다. 공짜는 없다. 얼마만큼 노력하고 쏟아붓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은 인성과도 연결돼 있다. 연기를 더 잘하기 위해선 절제와 겸손을 스스로 더 주문해야 한다.”

그런 그도 못해본 역할이 있다. 바로 의사 역이다.

“그동안 왕, 아버지, 형사 등 매우 다양한 배역을 맡아봤는데 아직 의사 역할을 해보지 못했다. 아마 내가 의사 같아 보이지는 않았나 보다. 내년쯤에 하게 될 작품에선 한 나라의 지도자 역할을 맡을 것 같다.”

김영철이 작품에서 보여준 카리스마 때문에 그는 선거철만 되면 각 정당에서 추천하는 비례대표 1순위 후보로 꼽히곤 했다. 실제로 지난 4·15 총선에서도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의 인재영입 대상으로 물망에 올랐다. 고향이 대구인 그는 2002년 16대 대선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선거 CF에 출연했고, 2016년 20대 총선에선 주호영 무소속 후보와 이상일 새누리당 후보의 지원 유세도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론 뚜렷하게 정치색을 드러낸 적이 없다.

“그때는 뭐라 답하기가 어려웠다. 총선이 끝나고 나니 홀가분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나이에 이제 와서 무슨 국회의원을 하겠나. 물론 이순재 선배님도 늦은 나이에 의원을 하셨다. 그러나 그 길은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문성이 없다. 그런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이번 총선 결과, 초선 의원이 전체 의석의 절반 정도 된다고 들었다. 젊은 인재들이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주기를 바란다.”

대신 김영철은 연기자로서, 또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더욱 충실하겠다고 했다. 그는 TBC의 연기자 후배였던 이문희와 결혼해 두 아들을 뒀다. 큰아들은 대기업에 다니고 있고, 작은아들은 결혼한 후 미국 뉴욕에서 디자인 일을 하고 있다.

“얼마 전 뉴욕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받았다. 요즘 내가 ‘동네 한 바퀴’를 촬영하고 유튜브도 열심히 하니까 자주 봤나 보다. 아들이 ‘아버지가 존경스럽다’는 말을 처음 했다.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살면서 아버지의 삶을 돌이켜보면 정직하게 살아온 것 같아 존경스럽단다. 아버지가 이런 일을 이겨내고 왔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했다. 아버지를 이해해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

김영철은 그동안 배우로서 자신의 삶이 치열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젠 다른 가치에도 눈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는 화려해 보여도 내면에는 어려움이 많고 또 모두가 다 배우로 성공할 수는 없다. 성공한 배우가 되지 못하면 비참한 면도 없지 않다. 주제넘지만 우리는 모두 자기 생(生)의 배우라고 생각한다.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 뭐 그렇게 막 죽을 듯이 살 것 없지 않은가. 시냇물처럼 흘러가면 되고, 가다 보면 급하게 내리꽂히기도 하고 천천히 오르기도 한다. 그보다 먼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김인구 기자 clar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