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1737년에 지어져 현존하는 최초의 왕립 오페라하우스,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

김학민의 오페라 문화사 - ④ 오페라의 유토피아 재현

■ 예술 미학
18세기 바로크오페라, 형식·내용의 표준화… 아리아 배치 고정·해피엔딩 서사
계몽주의 군주 철학 과시 위한 최적의 예술… 왕립오페라 건물도 잇따라 건축

오페라 역사는 몇몇 위대한 작곡가를 영원한 슈퍼스타로 빛나게도 하지만, 한때 잘나가던 작곡가와 이들의 작품들을 시간의 어둠 속에 영원히 매장해 버리기도 한다. 오늘날 영화만큼이나 오페라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바로크 시절에는 몬테베르디와 헨델 외에도 수많은 작곡가의 오페라들이 전 유럽에서 인기를 누렸다.

피렌체, 로마, 베네치아 등 일부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초기 이탈리아 오페라는 서서히 이탈리아 전역과 유럽의 다른 나라들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17세기 중·후반 이탈리아 오페라의 중심지, 베네치아의 스타 작곡가였던 카발리, 체스티와 후배들의 작품들은 입소문을 타면서 유럽 여러 도시로 퍼져 나갔다.

빈의 특별 야외 궁전극장에서 공연된 체스티의 ‘황금사과’(1668)는 화려함과 규모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수백 명의 합창단과 무용수와 더불어, 주·조역급 등장인물만 50명이 넘은 이 공연은 배 난파 장면, 탑 무너지는 장면 등 66개의 장면을 위해 무려 24개의 무대세트가 사용된 초호화 스펙터클 공연이었다(Grout, 1965, 91∼93). 이 오페라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드 1세와 스페인 마르가레트 테레자 공주의 결혼 축하를 위해 기획됐는데, 미의 화신으로 파리스가 선택한 비너스 여신 대신, 테레자 공주에게 황금사과가 돌아가는 아부의 엔딩이 흥미롭다. 후원자의 구미에 맞게 유럽 최고의 왕가에 시집오는 공주에게 무한한 영광을 돌리기 위해 신화의 내용까지 변경한 것이다.

◇왕립 오페라하우스의 유래

이탈리아 오페라의 인기는 18세기 유럽 오페라하우스들의 경쟁적 건립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17세기 베네치아의 오페라하우스들에 이어,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1737), 밀라노의 라스칼라 극장(1778),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1792)이 건축됐다. 합스부르크 왕국(오스트리아권)에서는 즈빙거 오페라하우스(1719: 드레스덴)가 세워졌고, 프로이센 왕국(독일권)에서는 도이치 오퍼(1742: 베를린)가 세워졌다. 영국(런던), 프랑스(파리), 러시아(상트페테르부르크), 포르투갈(리스본)에 오페라하우스가 세워진 것도 바로 이때였다.

18세기 유럽의 오페라하우스들은 흥행을 목적으로 한 ‘공공’ 오페라하우스도 있었지만, 영리와는 상관없이 지어진 ‘왕립’ 오페라하우스가 더 많았다. 특히 대규모 극장의 후원자는 막강한 권력을 쥐락펴락했던 통치자들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호프’(궁전) 테아터, ‘로열’(국왕) 오페라하우스, ‘두칼’(공작) 테아터와 같은 유럽 극장의 이름들은 이 시절 오페라가 왕의 강력한 후원에 의해 육성됐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통치자들은 새로 지은 ‘왕립’ 오페라하우스를 관리하기 위해 극장감독(인텐던트)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만들었다. 이들의 역할은 통치자의 구미에 맞도록 레퍼토리를 짜고, 제대로 된 대본작가와 작곡가를 물색하는 것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독일권에 남아 있는 ‘인텐던트’의 용어와 역할은 불과 몇 십 년 전 베네치아의 공공 오페라하우스들에서 박스석을 관리하며 공연 비즈니스를 했던 ‘임프레사리오’(흥행주)와 확연히 구별되는, 유럽 오페라의 새로운 문화였다.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대제(1712∼1786)는 규모와 화려함에서 ‘왕립’ 오페라하우스의 표본을 제시했다. 그는 1740년 프러시아의 황제 자리에 오르자마자, 수도 베를린의 궁전 곁에 있는 베를린 중심도로, 운터 덴 린덴 거리에 대형 오페라하우스 착공식을 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도이치오퍼(1742)는 화재 방지를 위한 폭포수와 운하시스템 등 통치자의 위용을 과시했다(Parker 1996, 33).

이미지 크게보기 이탈리아 로마에서 창립된 극보수 문학·예술협회, ‘아르카디아 아카데미’(1690)의 현재 모습.

◇합스부르크 왕가의 그림자

유럽의 명문 왕가들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확산에 큰 몫을 담당했다. 그중 오스트리아와 독일권을 지배하던 신성로마제국과 프로이센 통치자들의 역할은 너무나 컸다. 프랑스, 영국과 달리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이렇다 할 연희의 전통이 없었기에 이탈리아 오페라의 매력에 더 빠져들었다.

18세기 초·중반 이탈리아 오페라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었다는 사실은 문화사적 관점에서 이탈리아 오페라가 지닌 묘한 아이러니를 내포한다. 당시 이탈리아 도시들은 르네상스 시절의 경제력과 독립성을 잃고 (17세기 스페인에 이어)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됐는데, 식민 상황이 되레 이탈리아 오페라가 활짝 꽃을 피워 유럽 각지로 퍼져 나간 결정적 계기가 됐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6세(1685∼1740)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열렬한 마니아였다. 왕가의 궁전이 있는 빈에는 이탈리아 오페라 공연이 끊이지 않았고, 이를 위해 왕은 탁월한 문장력을 가진 이탈리아 시인들을 궁전시인의 자리에 앉혔다. 왕립 도서관에는 왕의 특명으로 밀라노와 나폴리에서 공연된 이탈리아 오페라의 오리지널 악보와 대본이 빠짐없이 보관됐다(Strohm 1979, 75: Kimbell 182 재인용).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외국 왕가의 영향력은 이탈리아 현지에도 작용했다. 스페인 샤를 3세(1734∼1759)의 후원으로 산 카를로 왕립 극장이 세워졌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도 왕성히 오페라 공연이 이뤄지고 있는 산 카를로 극장이다.

한편 밀라노의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1754∼1806)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식민’ 도시 밀라노를 이탈리아 오페라의 새로운 중심지로 키웠는데, 이렇게 해서 탄생한 라스칼라 극장(1778)의 원래 이름은 라스칼라 ‘신왕립’ 공작 극장이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오스트리아 빈 궁전시인 메타스타지오의 초상화로, 메에텐스(Martin van Meytens)가 그렸다.

◇유토피아의 재현

18세기 초·중반의 이탈리아 오페라는 당시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던 계몽주의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어둠에 이성의 빛을 비추는 계몽주의 철학사조가 시대의 대세인 것을 직감한 유럽의 왕들은 몸소 ‘계몽’ 군주의 제스처를 보였는데, 오페라는 이들의 통치 철학을 과시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예술 형식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는 라스칼라 극장을 지을 때 권위의 상징이던 바로크 양식 대신, 새로운 ‘신고전’ 양식으로 건물을 디자인하게 했다.

로마 시인 스탐필리아(1664∼1725), 베네치아 시인 제노(1669∼1750), 그리고 나폴리 시인 메타스타지오(1698∼1782)는 차례로 빈궁의 궁전시인의 자리에 오르면서 오페라 대본 창작을 통해 통치자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했다.

스탐필리아가 세운 극보수 문학·예술 협회인 아르카디아 아카데미(1690, 로마)는 원래 이탈리아 시와 문학의 우아함을 복원하기 위해 세워진 단체였지만, 1년 뒤 제노가 세운 아니모시 아카데미(1691, 베네치아)와 합치면서 계몽군주 통치이념을 오페라 작품에 녹여내는 방법을 모색했다. 스탐필리아 협회의 이름에 포함된 ‘아르카디아’(지상낙원)와 제노 협회의 이름에 포함된 ‘아니모시’(용맹)는 통치자의 영도(領導)로 젖과 꿀이 흐르는 지상낙원을 당시 오페라가 재현하려 했음을 잘 말해준다. 후배 시인, 메타스타지오도 이 협회의 2세대 주요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새로운 문화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계몽된’ 개혁을 꾀했다(Kimbell, 182).

◇오페라의 표준화

18세기 초·중반 빈 궁전시인들의 표적은 17세기 중·후반 이후 이탈리아에 성행했던 베네치아의 ‘상업’ 오페라였다. 궁전시인들의 이상주의적 잣대로 볼 때 베네치아 오페라는 플롯이 너무 복잡할 뿐 아니라 비극과 희극이 너저분하게 섞이고, 노래의 질서감도 없는 ‘오염된’ 오페라였다. 이들은 오페라의 타락상을 개혁하기 위해 메스를 가하기 시작했다. 비극적 스토리에서 희극적 요소를 제거했고, 가사와 노래의 형식을 질서정연하게 가다듬었으며, 교훈적 메시지를 강화했다.

제노는 이탈리아의 라신느 혹은 코르네유라 칭송받을 정도로 빼어난 시인이었으나, 정작 음악에는 문외한이었다. 반면 메타스타지오는 “호머와 단테 같은 천재적 감각의” 시인인 동시에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Grout, 1965, 185). 메타스타지오는 제노에 이어 빈 궁전시인의 자리에 오르면서(1730), 27편의 오페라 대본으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스탠더드를 제시했다.

메타스타지오류의 오페라에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무한 반복 패턴처럼 교대로 나왔다. 중창은 거의 나오지 않았으며, 한 막의 시작과 끝에는 합창이 배치됐다. 예전 같으면 아리아가 한 장면의 시작(escite)이나 중간(medie)에 나오기도 했지만, 이제는 무조건 한 장면의 끝(ingresi)에 아리아가 나와야 했다(Kimbell, 188).

바로크 오페라의 정형화된 노래 배치법은 근대 낭만 오페라의 극적 노래와 흥미진진한 영화식 서사에 익숙한 오늘날의 감수성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 가지 않는 면이 있다. 실제 초기 오페라에서 그토록 생동감 넘치던 노래의 섬세하고 극적인 느낌은 사라지고 아리아의 기교와 감정만 남았다.

하지만 레치타티보-아리아의 반복 패턴은 오페라 속 노래들의 질서감을 통해 유토피아를 재현하려 했던 나름 정교한 전략이었다. 유토피아적인 질서감은 아리아의 가사를 이룬 두 개 연의 패턴에서도 드러났다. 아리아의 두 연은 대비되는 두 정서를 표현했는데, 두 연의 끝에 첫째 연을 반복함으로써 질서의 회복을 내포했다. 다카포 아리아라 불리는 당시 아리아 속에 담긴 “의무와 본능, 이성과 욕망 등 대비되는 두 정서는 인간 정서의 내적 갈등을 세련되고 안정되게 담아내는 완벽한 형식”이었다(Parker 편, 36).

◇오페라 세리아

메타스타지오류의 바로크 오페라는 오페라 세리아였다. 이탈리아어로 ‘진지한 오페라’라는 뜻인 오페라 세리아는 그리스 비극을 변형한 ‘진지한’ 오페라로, 이탈리아의 스카를라티, 페르골레지, 비발디, 빈치 오페라와 독일의 하세, 칼데라, 헨델 오페라가 모두 오페라 세리아였다.

오페라 세리아는 선과 악을 대비시키는 공통된 서사 패턴으로 돼 있다는 점에서 스토리의 뼈대가 동일하다. 선한 주인공이 악한 때문에 고초를 겪다 용맹함, 덕성, 혹은 사랑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한다는 해피엔딩(리에토 피네)의 구도는 지배자 아래 행복한 유토피아를 재현코자 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확인시켜준다.

오페라 세리아의 전형을 제시했던 궁전시인, 메타스타지오는 누구보다 그리스 비극 예찬론자로 그리스 비극에서 오페라의 전형을 찾았지만, 실제 메타스타지오 오페라의 해피 엔딩은 비극의 핵심인 죽음의 엔딩과 이를 통한 동정과 공포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해결 방식이었다.

선악의 극명한 대비를 통한 해피 엔딩과 질서정연한 음악, 정형화된 감정 표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 전성기 바로크 오페라는 절대왕정 시절 통치자가 꿈꿨던 이상 상태에 대한 순응주의의 결과물이었다. 이를 위해 싱싱하게 꿈틀거리던 초기 바로크 오페라의 생동감은 사라져야만 했고, 빈자리에 궁전의 정돈된 질서와 감정의 세계가 새롭게 들어섰다.

경희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 용어설명

레치타티보 : 몇 개의 음높이로만 된 말처럼 단순한 노래

아리아 : 독립된 형식을 갖춘 솔로 노래

중창 :
이중창, 삼중창과 같이 여럿이 같이 부르는 노래

다카포 아리아 : 바로크 이탈리아 오페라에 나오는 전형적 아리아 형식으로, 두 번째 섹션 뒤에 머리(카포)에 해당하는 처음 섹션이 반복, 변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