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자코포 페리가 16세기가 끝날 무렵에 작곡한 최초의 오페라 ‘다프네’는 악보가 없어졌다. 그림은 ‘아폴론과 다프네’(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18세기경 작품).

■ 예술 미학

① 탄생의 문화적 징후

오페라의 전신은 막과 막 사이 공연된 춤·노래 여흥물‘인테르메디’
코르시 백작이 후원한‘다프네’가 최초… 르네상스 인본주의가 종합예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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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는 박제된 예술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생명체 같은 것이다. 오페라라는 유기체의 탄생지는 16세기 말∼17세기 초 이탈리아지만, 21세기 동아시아에 살고 있는 나의 삶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과거에 탄생한 수많은 오페라 명작들이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고, 명 연출가들이 다른 아티스트들과 고민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내 삶의 면면들을 들추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연재는 서양 종합예술의 꽃인 오페라를 호사취미의 대상이 아니라 호기심과 앎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위해 기획됐다. 오페라사에 있어 중요 지점들의 문화 사회적 맥락들과 연관 예술 장르들과의 연관성을 쫓다 보면, 오페라가 끊임없이 다른 예술 장르, 동시대 문화현상들과 함께 호흡하며 탄생한, 살아 숨 쉬는 유기체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인본주의 이상의 실현으로서 오페라

오페라는 태생적으로 인본주의의 꿈을 품고 있다. 현실이 아니라 이상과 환상을 쫓는 오페라의 속성은 오페라 탄생을 앞둔 전성기 르네상스 시절, 이탈리아 피렌체의 문화 사회적 배경에도 묻어나 있다.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도시 피렌체는 당시 유럽의 문화·예술·교역의 중심지로, 바로 이 도시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됐고 또한 르네상스 최고의 전성기를 꽃피웠다. 그리스 정신문화의 복원운동으로 찬란한 예술의 개화(開花)가 이루어진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에서 오페라가 탄생됐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피렌체의 르네상스 문화는 피렌체 시민들의 건강하고 자발적인 ‘시비타스’(시민의식)와 더불어(김상근,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2010, 16), 부유한 사람들의 후원과 예술가들의 사명 의식이 큰 몫을 했다. 메디치 가문으로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했던 코시모(Cosimo di giovanni·1389∼1464)는 은행업과 직물업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 출신이었지만 예술을 후원하고 학문과 문화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오페라 탄생의 정신적 뿌리가 된 그리스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인류 최초의 예술 동호회, ‘플라톤 아카데미’도 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학문과 예술을 재건한다는 그의 원대한 꿈은 아카데미의 수장 자리에 오른 피치노(Marsilio Ficino·1433∼1499)의 그리스 고전 번역 작업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르네상스 문화운동의 핵심에 해당하는 ‘네오 플라토니즘’을 낳았다.

코시모가 피치노의 기용으로 네오 플라토니즘의 정신적 길을 열었다면, 그의 손자인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1449∼1492)’는 인본주의의 예술적 결실을 거두었다. 네덜란드 출신 작곡가 하인리히 이삭 등을 불러 피렌체 사육제를 위해 수많은 세속노래를 작곡, 연주하게 했고 보티첼리, 다빈치, (어린) 미켈란젤로를 후원해 인본주의 회화의 전성기를 누렸다.

◇오페라 탄생의 전사(前史)

이미지 크게보기 희극 ‘라 코파타리아’의 막간 여흥물(인테르메디)은 큐피드와 프시케의 사랑을 소재로 했다. 그림은 프랑수아 제라르의 ‘에로스와 프시케(1798)’.

‘위대한 로렌초’가 후원했던 화가들은 플라톤적인 초월적 아름다움과 내적 감각, 정신을 조형예술로 실현했다. 메디치 가문이 머물렀던 여름 궁전의 화창한 봄날을 묘사한 보티첼리의 ‘봄’(1482년경, 우피치 미술관)은 전쟁의 신 머큐리, 미의 여신 비너스, 꽃의 여신 플로라 등 그리스 신들의 행복한 모습을 생동력 있는 색감과 독특한 상상력으로 담아냈고, 또 다른 명작 ‘비너스와 마르스’(1483년경, 런던 국립미술관)는 미와 용맹함이 하나 되는 감각적 사랑의 이상적 재현을 시도했다. 오늘날 초현실주의를 연상케 하는 보티첼리의 회화는 소재를 떠나 인간 감정의 인본주의적 재현을 꿈꾸던 초기 오페라의 이상에 본보기가 됐다.

인본주의 학자들의 열정도 오페라 탄생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메이(Girolamo Mei)는 14년간 바티칸 도서관에 틀어박혀 고대 그리스 비극 및 음악을 연구했고, 그 결과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 에스킬루스의 ‘아가멤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등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막간극 ‘인테르메디’(비극 혹은 희극의 막 사이에 공연된 초호화 노래와 춤의 여흥물)는 오페라 실제에 근접한 초호화 물로, 명문가들의 경쟁심을 자극했다. 희극 ‘라 코파타리아’의 인테르메디(1565)는 사랑의 신 큐피드와 영혼의 신 프시케의 사랑을 소재로 했고, 희극 ‘순례의 여인(La Pellegrina)’의 인테르메디(1589)는 아폴로와 거대한 뱀 피톤의 전투, 화성(和聲)의 여신 하르모니아가 아모르 신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 피에리데스 아홉 자매와 뮤즈들의 노래경연대회 등을 소재로 했다. 신들의 무릉도원 결투를 재현하는 한편, 구름 형상을 한 대형 기계를 활용해 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연출했다. 그 시절 어떻게 그런 기술이 있었나 싶게 온갖 무대 테크놀로지와 스펙터클이 총동원된 인테르메디는 그리스 신화 소재로 된 초기 오페라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인테르메디와 더불어 타소의 ‘아민타’(1583), 구아리니의 ‘믿음직스러운 양치기(Il Pastor fido)’(1581∼1590)와 같은 ‘파스토랄’(전원극: 음악과 극이 부수적이고 시 낭송을 중심으로 이루어짐)과 ‘마드리갈 코미디’(무대에 올려지지는 않았지만 이야기 서술과 모놀로그 및 대화가 섞임)도 성행했다.

◇비너스의 탄생

이제 드디어 오페라가 태어날 차례가 됐다. 그런데 걸림돌이 되는 한 가지 문제가 대두됐다. 모든 게 준비되었건만 스토리를 노래로 표현하는 극음악 양식이 없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시 노래들(마드리갈, 모테트, 미사곡 등)은 대부분 여러 성부가 동시에 나오는 다성음악이었다. 다성음악은 정교하고 기법적으로 완벽했으나 정작 무대 위에서 연극 대사에 준하는 기다란 가사를 음악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복잡했고, 무엇보다 극 전개와 가사 전달에 한계가 있었다.

오늘날 오페라의 레치타티보 혹은 우리나라 판소리에 사용되는 서창(敍唱) 형식으로 오페라 탄생의 최후 조건을 완성한 영광의 주인공은 피렌체의 아마추어 예술 동호회인 ‘카메라타’(1573∼1600년경)였다. 회원 중 하나였던 갈릴레이(Vincentio Galilei: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아버지)는 고대 그리스 음악과 시에 관심을 기울이던 끝에 ‘모노디’라는 새로운 노래 형식을 창안했다. 그리스 음악이 말과 노래의 중간 성격을 지닌 단선율 음악이었다는 메이의 편지가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후 갈릴레이는 감정표현과 화성에 대한 여러 편의 논문과 저서 ‘옛 음악과 현대음악에 대한 대화’(1581)를 통해 모노디 양식만이 가사의 의미와 감정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음을 피력했다. 또 다른 카메라타 회원, 카치니(Giulio Caccini)는 모노디 이론을 실제 노래에 적용하기 위해 노래집 ‘새로운 음악(Le Nuove Musiche)’(1602)을 출판했다.

카메라타 회원들은 모노디로 된 음악을 ‘재현예술’(stile rappresentativo) 혹은 ‘음악으로 된 드라마’(drama per musica)라고 부르면서, 드라마를 통해 세상을 모사(摹寫)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이론을 전면에 내세웠다. 당시 학자들과 음악가들은 단선율로 된 모노디(신음악)와 다성음악으로 된 마드리갈(구음악) 중 어느 것이 더 좋은 음악인지에 대해 수많은 논쟁을 벌였다.

◇치열한 경쟁의 역사 속 오페라

이미지 크게보기 오페라 초창기의 라이벌 작곡가인 줄리오 카치니(왼쪽)와 자코포 페리.

하지만 오페라 탄생과 관련해 카메라타의 역할을 여기까지였다. 카메라타의 후원자였던 바르디(Bardi)의 뒤를 이어 피렌체의 새로운 후원자로 부상한 코르시(Jacopo Corsi)는 로마에서 페리(Jacopo Peri)라고 하는 젊은 작곡가를 데려왔다. 페리는 카치니가 방심하는 틈에 오페라 ‘다프네’(1597~1598)를 작곡해 코르시의 궁전에서 공연했는데, 악보는 소실됐지만 이 오페라가 인류 최초의 오페라이다.

악보가 남아 현존하는 최초의 오페라의 영예도 페리에게 돌아갔는데, 이것이 바로 ‘에우리디체’(1600년 10월 6일)이다. 이 오페라는 메디치 가문의 마리아 공주와 프랑스 헨리 4세의 결혼식을 기념하는 축하공연이었다. 당시 후원자 코르시는 카치니에게는 대형 오페라 ‘케팔로스의 겁탈’의 작곡을 의뢰했고, 페리에게는 소규모 오페라 ‘에우리디체’를 의뢰했다. ‘케팔로스…’가 3000명의 귀족 남자와 800명의 귀부인 앞에서 100여 명의 연주자가 4시간이 넘도록 공연하는 초호화 스펙터클 작품이었던 반면, ‘에우리디체’는 고작 300명의 소수 귀족이 참석한 피티 궁전의 작은 방에서 열린 소박한 공연이었다. 카치니는 바르디와 함께 ‘에우리디체’ 공연의 방해 공작을 펼쳤으나 결국 ‘케팔로스…’가 공연되기 3일 전에 ‘에우리디체’의 역사적 공연이 이뤄졌다.

이후에도 카치니는 페리가 작곡한 ‘에우리디체’에 자신도 몇 개의 곡을 작곡했다는 거짓 주장을 했고 ‘케팔로스…’(악보는 거의 소실됨) 공연을 마치자마자 동일 대본(리누치오)과 엇비슷한 음악을 가지고 서둘러 카치니 판 ‘에우리디체’를 작곡했으며, 1년 후 초연을 하자마자 페리보다 먼저 악보 출판(1601)을 하는 꼼수를 벌였다.

최초의 오페라를 두고 벌인 두 작곡가 페리와 카치니의 경쟁은 오페라 탄생에 대한 인본주의 예술가들의 뜨거운 관심을 잘 말해준다. 작곡가들뿐 아니라 후원자들(바르디와 코르시)도 경쟁을 벌였고, 음악학자들(메이와 갈릴레이)도 연구 경쟁을 벌였다. 고대 그리스 문화와 예술의 부활이라는 인본주의적 사상으로 촉발된 흥미로운 종합예술 탄생의 경쟁 역사는 오페라라고 하는 현란한 예술 장르가 앞으로 벌이게 될 발전과 퇴보의 긴 역사에 대한 예고편에 불과하다.

경희대 교수


■ 문예부흥

오페라 탄생 직전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에 오페라 탄생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네오 플라토니즘의 기치 아래 그리스 문화예술의 복원에 대한 열정이 불타 올랐고, 보티첼리 같은 천재적 화가의 상상력으로 이상주의적 예술 표현 욕구가 팽창했다. 그리스 비극 번역본과 신들의 모습을 담은 삽화집이 출판됐으며, 인테르메디 등 초호화 무대 여흥물들이 본격적 종합예술(오페라)의 창작 욕구를 자극했다.

일상적 사교 모임에서는 ‘마드리갈’이라는 격조 높은 세속 노래가 유행했다. 베네치아에서 유래한 ‘복합창 양식’(대형 합창과 오케스트라가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오늘날 스테레오 효과를 이룬 대형 성악음악)으로 오페라 무대에 어울리는 대형 오케스트라와 합창도 갖추어졌고 파반, 발레토, 갤리어드 등의 춤곡들은 오페라 무대 위 춤 장면을 연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영문학(고려대), 음악 이론(서울대 음대), 오페라 연출(미국 텍사스오스틴주립대)을 공부했다. 월간 ‘객석’ 평론상 수상 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서양음악 평론활동을 했다. ‘오페라 읽어주는 남자’ ‘서양음악의 유산’ 등을 저술·번역했으며, 오페라 ‘아이다’ ‘오르페오’ ‘루살카’ ‘보리스고두노프’ 등을 연출하거나 제작했다. 국립오페라단 단장 겸 예술감독(2015∼2017)을 지낸 후에 경희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복귀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