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위기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1월 ‘극한직업’이 무려 1600만 관객 흥행에 성공하고, 5월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황금종려상까지 받으며 시끌시끌했는데 어느새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습니다.

7~8월 대목 시장에서 눈에 띄는 작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장 관객들은 “볼 만한 영화가 없다”며 불만을 쏟아냅니다. 조폭·경찰 등 매번 소재와 장르가 비슷하고, 똑같은 배우만 나와 피로하다는 거죠.

이 상황에서 제작비 3억 원 안팎의 작은 영화 ‘벌새’의 활약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벌새’는 8월 29일 개봉 이후 17일까지 7만8464명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보통의 상업영화와 비교했을 때 보잘것없는 스코어입니다. 하지만 개봉 이후 20일 가까이 박스오피스 ‘톱10’안에 버티면서 하루에 3000~4000명씩 꾸준히 모아 손익분기점(약 6만 명)을 돌파한 데는 박수를 쳐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결은 뭘까요? 가장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가장 보편적이고 공감 가능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점입니다. ‘벌새’는 1994년이라는 25년 전의 과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섬세한 대사와 설정으로 마치 지금의 우리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나아가 ‘1994년의 한국’이라는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국적과 인종에 상관없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김보라 감독은 초고를 10번 이상 고쳐 썼다고 하네요. 시나리오 단계에서 다양한 모니터링을 통해 수정을 거듭했답니다. 개인적인 것을 모두의 경험으로 승화한 것입니다.

독립영화가 위기의 해법이 될 수는 없을 겁니다. 규모 있는 투자를 통해 큰 그림을 그리는 영화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이즈’의 문제가 아닙니다. 티켓 파워가 검증된 배우에게만 기대려는 태도, 웃음과 감동을 적당히 버무려 관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시나리오, 쪼그라든 시장에서 모험을 하지 않으려는 제작 마인드 등이 걸림돌입니다. 시청률에 안주하던 지상파들이 지금은 최악의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좋은 시절에 대비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한국영화도 그런 기미가 보입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한 달 이용료가 영화 한 편 값도 안 되는 시대. 관객들을 불러오기 위한 과감한 시도, 치열한 고민이 절실합니다. 더는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한국영화의 또 다른 100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