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 ‘신입사관 구해령’

MBC 수목극 ‘신입사관 구해령’은 여성인 주인공 구해령(신세경)이 사관이 되는 이야기다. 본래 사관은 임금의 정사를 기록해 실록의 사초를 만드는 직책이다. 이 드라마는 조선 왕실이 여성 사관들을 선발해 왕자와 대비의 일상까지 기록하게 했다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중종실록에 여성 사관 제도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는데,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드라마는 그 논의가 실현됐다고 가정한다.

이 이야기가 여성주의 흐름과 맞아떨어진다. 얼마 전 종영한 tvN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가 기존 트렌디드라마의 남녀 구도를 전복했던 것처럼 최근엔 수동적인 존재로만 그려졌던 여성 캐릭터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작가는 실록의 여성 사관 기록이, 사극에 여성주의 흐름을 반영할 좋은 소재라고 본 듯하다.

사대부 선비의 나라인 조선에서, 임금에게 간언하는 ‘청요직’은 선비 중의 선비만이 할 수 있는 명예로운 요직이다. 예문관 사관은 그 청요직으로 나아가는 길목으로 당연히 남성들의 철옹성이었다. 그곳에 여성이 진입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신입사관 구해령’은 바로 그 남성사회의 금기를 전복한다.

극 중에서 권신이 왕족을 견제하기 위해 여사관 제도를 주창하면서 일상을 기록할 언문만 알면 족한 특수직 정도로 운용하자고 한다. 하지만 개혁파인 세자의 주장으로 정식 과거(별시)를 펼쳐 급제한 여성들을 예문관 관원으로 임용한다. 당연히 파문이 일었고, 작품은 그 속에서 여성들이 사관으로 인정받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주인공의 캐릭터도 기존 로맨스 드라마의 관습에서 벗어난다. 기존의 매력적인 여주인공은 상냥하고 귀엽고 언제나 미소를 짓지만 지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드라마에서 구해령은 독서가 취미다. 게다가 로맨스 소설류를 경멸하면서 더 무거운 서책을 찾는다. 구해령의 보호자인 오빠는 구해령을 일반 사대부에게 시집보내 평범한 삶을 살게 하려 한다. 하지만 구해령은 사대부 사회의 한 부속품으로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금기 너머를 꿈꾼다.

요즘 여성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디즈니의 ‘미녀와 야수’에서 여주인공 벨도 독서가 취미였다. 일반 남성에게 시집가서 평범한 아낙이 되길 바라는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고 금기 너머를 꿈꿨다. ‘신입사관 구해령’도 이런 흐름을 잇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치 기존 로맨스 드라마와는 다른 여성주의 작품인 것 같다. 하지만 궁에 들어간 구해령은 결국 대군과 사랑에 빠진다. 왕자는 전형적인 로맨스 드라마 남주인공인 재벌2세 실장님 캐릭터의 일종이다. 로맨스 드라마 여주인공에겐 보통 흑기사도 따라붙게 마련인데, 이 작품에선 권신의 아들인 예문관 봉교가 흑기사다. ‘왕자님’도 구해령을 돕고, 흑기사도 구해령을 돕는 도식적 로맨스 구도다. 여성주의 떡밥으로 로맨스 팬들을 낚은 모양새다.

이런 류의 사극 로맨스로 작년에 tvN ‘백일의 낭군님’이 히트했다. 그 작품에선 코믹 코드가 돋보였다. ‘신입사관 구해령’이 그 코믹 코드를 잇지 않은 점이 아쉽지만 여성주의 시대 흐름을 반영한 로맨스로 기본적인 재미는 만들어내고 있다. 무거운 작품이 많은 시점에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드라마인 것도 장점이다.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