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손열음 감독이 평창대관령음악제 포스터 옆에서 포즈를 취했다. 아래 우산 쓴 사진은 비가 왔던 지난 15일 모습. 기자의 요청으로 빗속에서 온갖 자세를 취하면서도 시종 웃음을 지었다. 신창섭 기자 bluesky@

손열음 평창대관령음악제 예술감독

기획해보니 연주에 애정깊어져
이것저것하다 적성 찾은 느낌

정상급 단원들 모인 오케스트라
올해도 싸움없이 잘 하리라 믿어

콩쿠르 성적 형편없던 초등시절
내 재능이 어정쩡한가보다 생각

내성적이라는 걸 남들은 잘 몰라
미움받지 않으려고 티 안낼 뿐

예술하는 사람으로 유일무이한
대체불가 존재 되고픈 욕망있어

정명화·정경화 자매가 함께 맡았던 예술감독직이었다. 32세의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그 후임으로 위촉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음악계 안팎이 술렁거렸다. 2018년 3월의 일이었다. 평창대관령음악제가 제대로 펼쳐질 수 있을까. 이런 우려 속에 예술감독을 맡은 손열음은 기획·섭외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15회를 맞은 ‘여름 음악제’를 신선함이 가득한 ‘열음 축제’로 성공시켰다는 평을 들었다. 강원도가 주최하고 강원문화재단이 주관하는 평창대관령음악제는 동계올림픽 유치 활동의 하나로 2004년부터 시작했다. 국내 대표적 클래식 음악제로 성장했으나 동계올림픽이 끝난 이후 계속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혁신이 필요했고, 그런 요구 때문에 손열음 감독 체제가 들어선 것. 손 감독은 기획·섭외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연주를 통해 직접 관객과 만났고, 프로그램북에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직접 쓰며 대중에게 클래식을 쉽게 설명하려는 열의를 보였다. 그는 올해도 오는 31일부터 다음달 10일까지 강원 전역에서 펼쳐지는 제16회 평창대관령음악제를 이끈다. 그 준비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는 손 감독을 지난 15일 서울 세종로에 있는 음악제 사무실에서 만났다.

―작년 프로그램북은 격찬을 받았는데, 올해 부담이 되지 않았나요.

“부담스러웠어요. 작년 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책이라는 매체를 좋아하는 만큼 경외심이 있어서 그 자체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던 것이지요.(웃음)”

손 감독이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2015)라는 에세이집을 펴내 호평을 받기도 했다.

―연주와 저술 중 어느 게 재미있나요.

“각각 다른 재미가 있지만, 제 재능은 연주 쪽에 있으니까 연주와 다른 것을 비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글 쓰는 것이 좋기도 하지만, 너무 힘들고 오래 걸려요. 글은 영(0)에서 시작하니까 힘든 점이 있어요. 저희 연주자에게는 클래식 악보가 있는데….(웃음)”

손 감독은 인터뷰 중에도 얼굴이 발그레해질 정도로 자주 웃었다. 웃음소리도 그의 연주 색깔만큼이나 다채로웠다. 하하, 헤헤, 후후….

―작년 책에서 각 음악가와 작품에 붙인 ‘다소 주관적인 생각들’이 참 흥미로웠습니다.

“그랬군요. 저를 안 드러내려고 하는 게 제 글의 약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독자와의 공감을 위해선 주관적인 게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아서…. 연주자인 제 글은 평론가나 학자의 글과는 다른 노트가 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요. 올해 책도 (주관적인 생각들을) 비슷한 분량을 실었는데요. 프로코피예프 일기와 차이콥스키 편지처럼 작곡가의 글을 날것 그대로 전하는 것도 있어요.”

―작년 책은 모차르트-살리에리 관계 등 상식을 뒤집는 일화를 많이 담았습니다. 올해도 그런 게 있나요.

(손 감독은 책에서 18세기 음악가 살리에리가 천재 모차르트를 질투한 범재로 알려져 있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모차르트가 아버지와 아내에게 쓴 편지들을 보면, 살리에리에 대한 열등감이 묻어난다는 것. 오페라 ‘마술피리’가 살리에리에게 인정을 받았다며 자랑하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고 썼다.)

“모차르트는 정말 공들여 쓴 것이에요. 편지를 일일이 대조했지요. 이번에 그런 식으로 만든 게 차이콥스키 편지에요. 교향곡 5번이 나오는 내용을 다 모았는데, 감정이 계속 변하더라고요. 처음엔 작곡으로 설렌다고 했다가 조금 있으면 안 쓰인다고 절망하고, 그러다가 또 기뻐하고 실망하는 감정의 기복이 다 드러납니다. 보통 사람과 똑같은 것이지요. 우리는 차이콥스키를 거장으로만 인식하고 마치 성경 속 인물처럼 여기는데, 잘못 알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인간 차이콥스키에게도 불공평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차이콥스키 일생의 모든 애정 관계는 그의 음악에 원동력이 됐을 거라고 썼던데, 젊은 음악인 손열음에게도 애정 관계가 동력이 되나요.

“저한테는 인생의 큰 부분이에요. 음악 활동은 인생의 반영이니까요. 우선 남녀 간의 애정이 엄청 클 것 같고요. 가족과 친구들 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애정이 다르게 변하는 과정이 다 원료가 됩니다. 표현해서 전달하는 직업이니까, 과연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연구하고 싶어집니다.”

―작년 음악제에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함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아래 사진)해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스스로도 만족한 연주였나요.

“기본적으로 감흥이 많은 연주였어요.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로) 일일이 모아 놓고 악단을 한다는 것은 축복받은 자리잖아요. 생판 낯선 오케스트라에 가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저를 지지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뭉클했어요.”

작년 음악제에서 열광적 반응을 이끌어냈던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해외 정상급 오케스트라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음악가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올해도 박지윤, 이지혜, 김두민, 함경, 조인혁, 조성호 등 20명으로 꾸렸다.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 대한 기대가 올해도 높습니다만, 각자가 정상급 연주자이기 때문에 과연 싸우지 않고 끝낼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합니다.

“네, 네∼. 작년엔 정말 잘 됐는데, 올해도 정말 안 싸울까, 이 사람들 열정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이게 궁금한 점인데요, 저는 올해도 (싸움 없이) 그냥 갈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 오케스트라를 앞으로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지 고민이에요. 주인 의식을 지닌 분이 지휘자로 나설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이미지 크게보기

올해 음악제는 ‘다른 이야기(A Different Story)’라는 주제 아래 메인콘서트 12회, 스페셜 콘서트 10회, 지역민을 찾아가는 음악회 12회를 진행한다.

―클래식 음악제는 마니아와 대중을 함께 만족시켜야 하는 과제가 있지요.

“작년엔 그게 큰 고민이었어요. 강원 도민에게 사랑받으면서도 세계적 명성을 누릴 만한 수준을 갖추려 했지요. 이번엔 그냥 좋은 음악제를 만들었으면 해요. 사람들이 감동하는 음악제를 만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보다 근원적 질문을 했습니다. 여유가 생겼는지 모르겠으나….(웃음)”

그는 지난해 여름음악제뿐만 아니라 대관령겨울음악제를 성공시켰다. 그 덕분에 기획자로서 크게 인정받고 있다.

―다양한 활동을 하는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가요.

“어∼, 어∼. 장점은 연주와 연습에 더 애정이 생겼다는 거예요. 제 남동생이 저에게 ‘이거저거 해 보니까, 적성이 나온 것 같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에요. 요즘엔 음악이 제 귀에 들렸을 때, 충격적으로 좋을 때도 있어요. 단점은 시간이 모자라서 사생활이 부족한 거지만, 뭐, 제가 사람을 많이 만나는 스타일이 아니니까요.”

연주자로서 손열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스타다. 2014년 드라마 ‘밀회’에서 배우 김희애의 대사는 그것을 증명했다. “손열음이 대단한 건 뜨거운 걸 냉정하게 읽어내서야. 그래야 진짜 뜨거운 게 나오지.” 뜨거운 걸 냉정하게 읽는 연주는 유튜브에서도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가 연주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1악장은 조회 수 170만 회를,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 3악장은 148만 회를 넘었다.

―차이콥스키 1번, 라흐마니노프 3번은 연주가 어려운 곡인데, 어쩌면 그렇게 자신감 있게 타건(打鍵)을 할 수 있을까, 들을 때마다 감탄을 합니다. 그 강렬한 타건의 힘은 어디서 옵니까.

“(그는 질문을 듣는 동안에 얼굴이 붉어지며 수줍어했다.) 그렇게 들어주셨다면, 제가 좋은 선생님들에게 배운 덕분이에요. 감사히 여깁니다. 연주의 처음과 마지막은 기술인데,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힘들다고 생각해요. 나머지는 감정을 기술과 접목시키는 거예요. 감정을 덜 느꼈다면 표현을 잘할 수가 없지요.”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차이콥스키 청소년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를 차지했다. 당시 강원 원주에 살고 있던 학생 손열음은 실감이 나지 않았단다. “그때까지 국내 콩쿠르에서도 큰 상을 받지 못했거든요. 콩쿠르 성적이 안 나오니까 초등 저학년 때는 재능이 어정쩡한가 보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영(young)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상을 받았을 때, 별로인 대회인가, 할 정도였어요.(웃음)”

그는 중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 때 곡을 듣는 청음, 악보를 보는 초견 능력이 다른 학생들에 비해 월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음악이 좋아지며 평생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지요.”

손 감독은 초등학교 때부터 혼자 비행기를 타고 국제콩쿠르에 나갈 정도로 배짱이 두둑했다. 무대에 서거나 외부 활동을 할 때 보면, 시쳇말로 ‘인싸’의 전형으로 보이는데, 그 스스로는 내향적 성격이라고 했다.

“주변 사람들은 제가 내성적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밖에서는 티를 내지 않으니까 잘 모를 거예요.”

―왜 티를 안 냅니까.

“왜 그런지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은데, 아마 사람들에게 미움받지 않으려고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연주자로서 사람의 감정에 대해 깊게 들여다보는 그는 질투라는 보편적 감정 발산을 특이하게 한다고 토로했다. “보통은 남자 친구의 전 여친이나 여사친(여자사람친구)을 질투하는데, 저는 남친의 동생 혹은 어머니를 질투합니다. 남친의 감정을 총체적으로 따졌을 때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상을 질투하는 것이지요.”

그는 질투라는 감정을 이야기하다가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말했다. “예술을 하는 이로서 유일무이한,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있어요.”

유일무이한 음악가가 되고 싶은 손열음은 23일(현지시간)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BBC 필하모닉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했다. 이로써 세계 최대 클래식 축제인 영국 BBC 프롬스(proms) 무대에 데뷔한 셈인데, 그는 출국 전에 이렇게 말했다. “겁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그래요.”

인터뷰 = 장재선 문화부 선임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