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동원 이홍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국보 175호 ‘백자 상감연화당초문 대접’. 상감기법으로 연꽃무늬, 덩굴무늬를 새겨 넣은 조선백자의 대표적인 대접이다. 15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홍근, 중앙박물관에 4941점
이회림, 서울에 송암미술관 설립

1935년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해 해방될 때까지 10년을 개성에서 살았던 광주 사람 모후산인(母后山人) 오지호(吳之湖, 본명 오점수, 1905∼1982)는 서울 친구들에게 “만일 개성상인과 같은 경제적 배일(排日) 정신을 조선인 전체가 가졌다면, 일제가 조선침략을 통해 얻는 경제적 이득은 반감될 것이며, 광복도 빨리 올 것이다”고 말했다. 이렇듯 개성상인들의 단합과 결속, 이재에 밝은 상인의 기본은 대단했다. 어떤 이는 ‘개성상인이 앉았던 자리에는 풀도 안 난다’고 비아냥거리지만 누가 뭐라든 개성상인들은 타고난 성실함으로 한국의 상권을 잡았다. 이들은 대개 맨주먹으로 시작해 한 푼이라도 아끼며, 신용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며, 한 우물을 파며 개성상인이란 자부심을 쌓았다. 이런 그들의 마지막 신조는 “쓸 데는 아낌없이 쓴다”는 것이었다. 송상의 이런 정신과 자세는 평생 큰돈을 들여 어렵게 수집한 우리 미술품, 문화재를 국가에 기증하는 ‘쓸 데 아낌없이 쓰는 일’을 실천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중 알짜 중 알짜들은 대부분 개성사람 이홍근(李洪根, 1900∼1980)이 기증한 것들이다. 그는 개성에서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와 곡물과 양조, 보험업을 바탕으로 동원산업을 일구며 문화재를 수집했다. 1980년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유지를 받들어 유족들은 서화류 1309점, 도자기류 1467점, 금속공예품 123점 등 총 4941점을 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또 기증품의 조사연구를 위해 기금을 출연해 ‘한국고고미술연구소’를 설립, 지금껏 연구비를 지원해오고 있다. 요즘도 매년 학술대회 후에 후손들은 발표자들에게 술과 식사를 내며 연구에 답한다. 2018년 11월 추사의 ‘부작난’을 비롯해 ‘용비어천가초간본’ 등 귀중한 문화재 202건 304점을 기증한 석포 손세기(孫世基, 1903∼1983)와 그의 장남 손창근(孫昌根, 1929∼)도 개성상인이다. 사금융업을 통해 부를 일군 손세기는 국보, 보물급 미술품을 수집했고 사후 아들이 이를 중앙박물관에 기증했는데 기증자 명부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함자를 넣어 그 효심도 보물급이란 소리를 들었다.

이미지 크게보기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이렇게 통 큰 기증 대신 ‘비영리 공공성’을 전제로 한 미술관을 설립해 세상과 자신의 부를 공유하는 개성상인들도 있다. 한국미술의 보고인 ‘간송’, ‘호암’과 함께 ‘국보박물관’이라 불리는 호림박물관은 개성상인 윤장섭(尹章燮, 1922∼2016)이 설립했다. 개성공립상업학교 재학 중 우현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의 강의를 듣고 문화재에 눈을 뜬 그는 보성전문 상과를 졸업하고 1957년 성보실업, 1962년 유화증권, 1965년 현 성보화학을 설립했다. 1982년 대치동에 호림미술관을 개관해 1999년 신림동으로 이전하고 호림박물관으로 확대했다. 2009년엔 강남구 신사동에 분관을 개관했다. 한때 우리나라 최고의 현금 왕으로 불렸던 그는 가장 모범적이며 뜻이 분명한 사립박물관을 만들어 귀감이 됐다.

10대 후반에 자전거 배달로 시작해 20세인 1937년 건복상회, 1951년 개풍상사, 1955년 대한탄광, 1956년 대한양회 등 화학산업을 바탕으로 오늘날 ㈜OCI를 일군 송암 이회림(李會林, 1917∼2007)도 대표적인 고미술품 수장가로 개성상인이다. 그는 1989년 서울 수송동에 송암미술관을 설립해 1992년 인천으로 이전하고 2005년 인천시에 무상기증했다. 현재 미술관은 인천시립으로 운영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의 창업자 서성환(徐成煥, 1924∼2003)은 황해도 평산 출신이지만 개성에서 어머니와 함께 창성상회로 시작한 개성상인이다. 그 또한 사업 외에 문화재와 미술품 수집에 열중했는데, 그 정신은 아들 서경배(徐慶培, 1963∼)로 이어져 부자가 수집한 문화재와 미술품으로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을 열어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이렇게 개성상인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한국미술의 수호자’들을 배출했다는 점이다. ‘자린고비’라는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악착같이 돈을 모은 건 ‘나누기’ 위함이었다. 세상에 부자는 많아졌다는데 요즘 이런 개성상인 같은 부자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믿을 건 오직 돈밖에 없는 세상’인 때문일까.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