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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숙 논설위원

北서 ‘버림받은 신부’된 文정부
核 폐기 없는 평화는 헛꿈인데
김정은 말만 믿고 유화책 지속

한국의 체임벌린 자처하는 격
쿠바 위기 본질 간파 후 해결한
케네디처럼 核 폐기 外交해야

북한 비핵화 낙관론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4·27 판문점 선언은 1주년을 계기로 지급불능 수표가 돼 버린 형국이다. 오죽하면 지난4월 27일 판문점 행사 때 “문 정부는 결혼식장에서 신랑에게 버림받고 홀로 서 있는 신부 같다”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문 정부 신세가 그렇게 되리라는 것은 판문점 선언 당시부터 어느 정도 예견됐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이라는 판문점 선언의 수식어는 북한 비핵화가 전제되지 않는 한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문 대통령만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갔을 뿐이다.

1년 전 김 위원장과 손을 맞잡고 판문점에 선 문 대통령은 1938년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와 뮌헨 회담 후 “평화 시대가 왔다”고 선언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를 연상시켰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대화로 평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체임벌린과의 회담 후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고 유럽 대륙은 전쟁 공포로 빠져들었다. 이후 ‘체임벌린 같다’는 표현은 순진한 대화파를 조롱할 때 쓰인다. 문 대통령의 판문점 선언 1주년 영상 메시지는 체임벌린보다 더 체임벌린 같은 인상을 준다. 문 대통령은 메시지에서 “우리는 평화롭게 살 자격이 있다”고 했다. 또 “공감하고 함께해야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다”고도 했다. ‘되돌릴 수 없는 평화’ 등 감상적 어휘로 평화 세일즈를 할 뿐 그 평화가 어떻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선 외면했다. 한반도 평화가 북핵과 공존할 수 없는 것인데도 이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남과 북이 지혜를 나누면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줄 뿐이다.

지난해 판문점 정상회담 때엔 그랬을 수 있다. 김 위원장이 말한 ‘비핵화 진정성’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을 때였고, 그 덕분에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도 성사됐다. 그러나 베트남 하노이에서 김 위원장은 핵 폐기를 거부했다. 지난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 때에는 핵을 ‘국가의 근본 이익’으로까지 규정했다. 협상으로 포기할 대상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이런데도 문 대통령이 북핵 폐기를 외면한 채 낭만적 평화 담론을 꺼내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위기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거나, 아니면 북핵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평화를 구걸하며 살자는 태도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언급이다.

김 위원장이 핵 폐기 불가 의지를 밝힌 만큼,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수립된 문 정부의 대북 정책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돼야 한다. 김 위원장과의 4차 회담에 매달릴 게 아니라,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고, 어떻게 정책을 바꿔야 하는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위기의 수준과 양태는 다르지만,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의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대응은 나침반이 될 수 있다. 케네디는 위기 초반엔 체임벌린처럼 행동했다.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와 쿠바 최고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의 유화적 제스처를 신뢰했다. 그러다 미사일 위기가 미·소 핵전쟁으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자, 비로소 낙관론에서 벗어났다. 위기의 본질을 직시하고, 힘에 기초한 단호한 대응책을 폈다. 해상봉쇄 등을 동원해 위기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했다. 안병진 경희대 교수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분석한 ‘예정된 위기-북한은 제2의 쿠바가 될 것인가’라는 최신작에서 “케네디는 흐루쇼프와 카스트로에게 개인적 호감을 가졌지만, 그들의 군사적 모험주의 본질을 보면서 유화 노선의 한계를 깨달았다”고 진단했다.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친근감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북핵 해결의 열쇠가 될 수는 없다. 해상봉쇄와 압박으로 미사일 위기를 풀었던 케네디처럼, 문 대통령도 이젠 현실주의적 북핵 해결법으로 전환해야 한다. 북한의 조선반도 비핵화 주장 복사판인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도 버려야 한다. 4·11 한·미 워싱턴 정상회담 후 백악관은 완전한 북핵폐기(FFVD)를 적시했지만, 청와대는 한반도 비핵화로 썼다. 문 정부가 계속 이런 식이면, 북핵 폐기와 함께 미국 핵우산을 철폐하라는 김 위원장의 요구에 동조한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 이미 중·러가 북 주장에 편승하는 형국이다. 아울러 문 대통령은 동맹 및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통해 북핵 폐기를 이끌겠다는 선언을 해야 한다. 그것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케네디적 해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