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국가무형문화재 제86호 이기춘 보유자가 발효 중인 문배주와 누룩을 들어 보이며 술 제조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⑧ 문배주 기능보유자 이기춘 옹

증조할머니 기술 배운 할아버지
평양 ‘평천 양조장’으로 시작
6·25 일어나자 미아리서 명맥

양곡법으로 20년간 생산 중단
문화재 지정뒤도 가택수색 받아

태어나면서부터 늘 누룩냄새…
직장 다니며 술 만드는법 배워
부친 별세뒤 4대째 가업이어

전통술인 문배주(酒)의 ‘문배’는 순우리말이다. 문배는 재래종 배의 일종으로 꽃이 피면 그 향기가 온 마을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문배주는 문배꽃의 향을 수수와 조 등의 곡식을 발효해 살려낸 전통주다. 평양 인근에서 ‘문배술’로 불리우며 전래돼 온 증류주로 고려 태조 왕건 때부터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신하들은 왕에게 최고의 술을 진상하면서 ‘좋은 자리’를 얻고자 했고, 그중 한 가문이 빚은 술이 바로 문배주였다. 그 이후로도 문배주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에서 차례상에 올리는 귀한 술로, 가양주(家釀酒)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으나 일제강점기의 전통주 말살 정책으로 그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었다.

문배주의 기능과 전통을 이어지도록 한 이가 국가무형문화재 제86호인 문배주 기능보유자 이기춘(77) 씨의 증조할머니(박 씨 할머니)다.

“증조할머니에게 문배주 기능을 물려받은 할아버지(이병일)가 평양에 ‘평천(平泉)양조장’을 차렸고, 아버님(이경찬)이 이를 물려받아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기업으로 키웠어요. 대지 7000평의 공장에서 80여 명의 종업원이 일했고, 연간 소비하는 곡식의 양만 해도 3만 석에 이르렀죠. 술 만드는 공장이 당시 평양에 세 군데나 있었어요.”

그러나 일제의 말살 정책에도 살아남았던 문배주였지만 6·25전쟁의 참화로부터는 벗어날 수 없었다.

이 보유자의 부친인 이경찬 옹은 전쟁이 일어나자 평양에서의 사업을 접고 월남해 미아리 쪽에 대동양조장을 차린 뒤 ‘거북선’이라는 이름으로 문배술을 다시 생산한다.

그러나 문배주의 운명은 그 이후에도 기구하게 펼쳐진다. 1965년 양곡관리법으로 소주, 맥주, 막걸리를 제외한 곡식으로 만든 모든 술의 생산을 금지하며 이후 문배주 역시 생산이 중단된다.

이미지 크게보기 문배주 재료인 메조.

문배주가 다시 빚어지기 시작한 것은 우수성을 인정받아 이경찬 옹이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6호 기능보유자로 지정받고 1990년 6월 18일 술을 만들어 파는 것을 정부에서 정식으로 허용하면서부터다.

“술을 빚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국가에서 나라를 대표하는 술인 ‘국주(國酒)’ 이야기가 나오자 아버지 이름이 가장 먼저 거론됐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됐고, 문배주도 국가무형문화재의 자리에 오르며 국주로 인정받았죠. 그리고 예전처럼 술을 빚기 시작하셨습니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희석식 소주를 보면 ‘그걸 사람 먹으라고 만들었느냐’며 제사상이나 차례상에는 반드시 직접 술을 빚어 올리셨죠.”

문배주를 빚는 절차를 보면 왜 ‘국주’로 지정될 자격이 있는지 저절로 수긍이 된다. 우선 주모(酒母·밑술)를 만들어야 한다. 누룩가루를 물에 잘 풀어 ‘수곡’을 만든 후 고슬고슬하게 잘 지어진 메조밥을 넣어 주모를 만든다. 5일 동안 발효된 주모에 찰수수를 잘 익혀 덧술을 하고 하루가 지나면 두 번째 덧술을 안친다. 두 번째 덧술을 안치고 열흘 뒤 술을 증류해 문배주를 만든다. 그러나 여기가 끝이 아니다. 문배주는 증류 후 바로 마시지 않고 25도 정도 되는 서늘한 곳에서 1년 정도 숙성시켜야 진정한 향을 느낄 수 있다.

이경찬 옹은 양곡관리법이 풀리자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 양조장을 차려 다시 문배주를 빚었다. 그러나 이경찬 옹은 1993년 세상을 떠난다. 문배주의 명맥이 다시 끊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장남이었던 이기춘 보유자는 당시 국내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전 평양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누룩 냄새를 맡으며 자랐어요. 그러다 보니 회사에 다니면서도 집에서 계속 술 만드는 법을 배웠고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술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회사를 다닌다고 해서 그만둘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회사 일도 열심히 했죠. 회장 비서실 근무까지 했습니다.”

부친이 별세한 후 이 보유자는 집안의 사업을 물려받아 본격적으로 문배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좋은 물’을 찾아 경기 김포의 한 전원마을에 양조장(문배주 양조원)을 차렸다. 그리고 이 보유자의 아들인 이승용(44) 씨가 ‘조교’로 5대째 가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문배주야말로 ‘국주’라는 그의 자부심은 대단해 보였다. 지난해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도 문배주는 공식 만찬주였다.

“종종 미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열리는 한국 전통주 행사에 가면 문배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요. 아직은 교민들이 많이 찾지만, 장차 현지인들도 즐겨 찾는 술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입니다. 그러면 세계 시장에서 한민족 대표술로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김포 = 글·사진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