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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허조나 황희조차도 세속에서 약간 빼어난 사람일 뿐입니다.” 이이의 ‘동호문답’에서 처음 이 대목을 보았을 때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율곡 목하(目下)에 온전한 인물 없다’고 하지만 너무 야박한 평가가 아닌가 여겨졌다. 고려 말 내우(內憂)와 외침(外侵)으로 도탄에 빠져 있던 민생을 그 정도나마 일으켜 세운 게 세종시대 정치가들 아닌가. 이이 자신의 말처럼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해지고(富) 인구가 많아지게(庶)” 만든 사람들이 곧 허조와 황희인데, 이이 자신이 너무 오만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세종 말년의 리더십 승계 과정을 거듭 읽으면서 이이의 비판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세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최후 책무인 대권 전위(傳位:자리를 물려줌)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조선은 그의 사후 5년 만에 커다란 ‘정치적 홍역’을 치러야 했다. 1448년에서 1457년까지, 즉 세종 재위 30년째인 1448년에서 세조 재위 3년째인 1457년까지의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보면, ‘10여 년 사이에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전위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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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안타까운 것은, 세종에게 분명 계유정난(1453년)과 같은 정치적 홍역을 예방할 기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적장자인 세자 문종이 세종 자신보다도 배우기를 좋아해 집현전 학사를 포함한 대다수 지식인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비록 병약하긴 했지만 세종 재위 25년째인 1443년부터 근 7년간 왕 대신 국정을 무난히 섭정해온 경험도 있었다. 따라서 그 대신 다른 사람을 왕위 후계자로 세운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부왕 태종처럼 리더십 승계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더라면, 그래서 자식 중에서 가장 “영명하면서도 과단성 있는” 후보자에게 재위 말년에 세자 자리를 물려주는 일은 결코 불가능한 게 아니었다. 세종 자신이 자주 쓰는 표현대로 그것은 ‘불능(不能)’의 문제가 아니라 ‘불위(不爲)’ 즉 하지 않음의 문제였다.

세종은 첫째 아들 이향(李珦)이 병약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반면, 둘째 아들 이유(李)가 강인하고도 야심만만한 인물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둘째 아들에게 세종은 재위 27년째인 1445년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라는 대군 호칭을 내려줬는데, 그것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고 죽은 백이숙제처럼 너는 현실정치에 관심을 끊고 초탈하게 살아가라’는 당부였다. 세종 자신의 표현처럼 “계집아이와 같이” 유약한 장남 이향을 “큰 호랑이(大虎)”라는 별명을 가진 둘째 아들이 치고 나왔을 때의 혼란과 위험을 감지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위험에 대해 충분히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장남 이향을 세자로 세우고, 이어서 8살 된 이향의 아들(단종)을 왕세손에 책봉했으면, 부왕 태종이 그랬던 것처럼 아예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을 제거해 ‘잔인함의 미덕’을 살렸어야 했다. 그렇지 않을 거라면 애초에 “문무를 겸비하고 예악에도 뛰어난” 수양대군에게 전위를 해줬어야 했다.

문제는 세종의 성품에 있었다. 그는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다가 그 속에서 좋은 점을 찾아내는 데는 뛰어났다. 그들의 강점을 찾아내고 익숙하게 잘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도 잘했다. 하지만 누구를 미워하거나, 정치적으로 위험한 요인을 애초에 모질게 잘라내는 삼제(芟除)하는 데는 서툴렀다. 서투를뿐더러 싫어했다. 바로 그런 세종의 캐릭터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허조와 황희였다. 따라서 대권 전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밝혀서(明), 잔인함의 미덕을 발휘하도록 보필했어야(輔)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게 율곡의 비판이 아니었을까.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