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이도운 논설위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생모 고영희는 1952년 일본 오사카의 한인 마을 인근에서 태어났다. 고영희의 아버지 고경택은 제주도가 고향이다. 1913년생인 그는 1929년 오사카로 건너가 고영희 등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고경택은 일본 육군성 군복 공장에서 일했던 기록이 남아 있는데, 1962년 가족을 데리고 북한으로 들어갔다. 고영희는 만수대예술단 무용가로 활동하다 1972년 김정일의 눈에 띄어 동거를 시작했고 정철·정은·여정 3남매를 낳았다. 김정은에게 제주도는 외가(外家)라고 부를 만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문재인 정부는 김정은을 제주도와 연관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문 대통령은 지난 9월 20일 김정은과 함께 백두산에 오르며 한라산 정상도 오르자는 대화를 나눈 바 있다. 또, 최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북악산 등반에서도 “한라산에 헬기장이 없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11일에는 제주산 귤 200t을 북한에 보냈다. 북한이 보낸 송이버섯에 대한 답례라고 하는데, 김정은의 방남(訪南)에 다시 한 번 힘을 불어넣어 보려는 뜻으로 읽힌다. 지난 8일 뉴욕에서 열릴 예정이던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김영철 통일전선부장 간의 회담이 돌연 연기되면서 미·북 간 협상이 추동력을 잃은 상황에도 대응한 것으로 보인다.

‘삼다도’ 제주도는 ‘평화의 섬’으로도 불린다. 지난 2005년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 4·3의 비극을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시켜 세계 평화에 기여하게 해보자는 취지로 그렇게 지정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의 첫 회담 장소로도 거론됐다. 김정은이 한라산을 방문해 핵 포기라도 선언하면 제주도는 진정한 평화의 섬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은이 실제로 제주도를 방문하면, 북한은 오히려 ‘백두 혈통’인 김정은이 ‘한라산 줄기’이기도 하다는 선전·선동을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중간선거 이후 국제 정세는 김정은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중국도 다시 제재에 동참키로 했다. 문 정권도 현시점에서 귤 말고는 줄 수 있는 게 없다. 김정은이 ‘외가’인 제주도를 방문한다고, 헬기를 타고 백록담에 올라 문 대통령과 사진을 찍는다고 남북관계와 동북아 정세가 바뀌지는 않는다.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고 국제사회의 검증을 받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