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오늘 하루 즐거웠으니 내일도 즐거웠으면 하는 욕심이 생겨요.” 하루하루를 낙천적으로 사는 91세 할아버지 마술사 조용서 씨가 1일 경기 고양시 고양어린이박물관 공연장에서 어린이들에게 마술공연을 펼치고 있다. 김선규 기자 ufokim@

‘91세 마술사’ 조용서 翁

고양실버인력뱅크서 교육받고
어린이병원·요양원에서 공연
은퇴후 본격적으로 봉사 활동
日관광객 상대 통역재능 기부
스마트영화제서 남우주연상도

1·4후퇴때 혈혈단신으로 월남
베트남·사우디서 항만하역도
“90세 살면 9000번 우여곡절
지금도 하고 싶은일 너무많아
젊은세대들 포기않는 삶 살길”

“오늘은 핼러윈날이지요? 온갖 가면을 쓰고 노는 날이에요. 할아버지의 가면을 보겠어요?”

1일 오전 경기 고양시 덕양구 화중로 고양어린이박물관 3층 공연장. 공룡 코스프레를 한 마술사 조용서 할아버지가 유치원 어린이 관객 앞에서 갖가지 핼러윈 가면을 선보였다. 이어 모자에서 우산을 만들고 비둘기를 끄집어내는 등 우리가 흔히 보아온 마술을 펼쳐 보였다. TV를 통해 젊은 전문마술사 최현우의 고급 마술에 익숙해졌을 어린이들이지만, 두꺼운 공룡 코스프레로 인해 땀을 뻘뻘 흘리는 할아버지의 서툰 마술에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1928년생, 우리 나이로 91세의 조용서 씨. “일주일에 두 차례씩 고양어린이박물관에서 마술쇼를 합니다. 그 밖에도 요양원의 노인들이나 어린이 병원도 찾지요. 공연 전에 혼자 마술 도구를 담은 짐을 나르고 낯선 길을 찾아갈 때는 힘이 들어도, 돌아올 때는 환한 기쁨에 충만해집니다.”

자그마한 체구에 해맑은 웃음, 조리 있는 언어구사와 다소 느리지만 꼼꼼하게 의상과 마술 도구를 챙기는 몸놀림 등으로, 언뜻 보기에는 70대 초·중반 정도로 느껴진다. 대화를 나눌 때도 늘 웃음이 얼굴에 맴돈다. 흔히 뵐 수 있는 어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 씨가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에 뛰어든 것은 80세부터. 고양에 거주하는 조 씨는 고양실버인력뱅크에서 마술교육을 받았다. 교육과정을 마치고 ‘꿈전파 문화공연단의 마술팀’ 일원으로 어린이와 노인을 위한 공연에 나섰다. 요새도 마술교육과 훈련은 계속된다. 마술봉사뿐만이 아니다. 그는 틈만 나고 기회만 생기면 공부를 한다. 그림, 페이스페인팅, 요술풍선, 동화구연 교육도 수료하고 봉사에 나서고 있다. 일본어 통역 재능기부도 한다. 그는 “센추리얼 시대(백세시대)가 왔다지만, 나 자신은 백 세가 가까워져도 하루하루 봉사한다는 게 즐거움이에요. 복지관이 있다는 게 고마워요.”

고양실버인력뱅크에서는 월 30시간씩 봉사활동을 하면 27만 원의 활동비를 노인들에게 지급한다. 교통비 수준이다. 조 씨는 “활동비가 적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활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침에 눈을 떠 오늘 할 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이 어른의 끊임없는 낙천성과 호기심은 어떻게,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마 여유 있는 환경에서 살아온 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 씨가 살아온, 한국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짊어졌던 역정을 듣고 기자는 숙연해졌다. 평양이 고향인 조 씨는 일제강점기에 평양고보를 나왔다. 당시 서울의 경성고보(경기고 전신)와 어깨를 나란히 한 고등교육 기관이었다. 그는 지금도 일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영어도 수준급이다. 공산치하와 한국전쟁만 없었다면 그는 서울의 대학으로 유학해 당시에는 드물었던 인텔리로 이른바 높은 자리나 부를 일궜을지도 모른다. 그는 1951년 1·4후퇴 때 23세의 나이로 혈혈단신 월남해야 했다. “아버님은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누이가 평양에 있었는데, 영원히 헤어질 줄은 몰랐어요.” 웃음 띤 눈가가 잠깐 촉촉하게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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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일푼 실향민. “호구를 위해 입대를 했어요. 당시에는 5년간 군 복무를 했지요. 제대하고 운송회사도 다니고, 장사도 해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지요. 서른에 결혼은 했으나 여전히 무일푼이었어요.” 마흔에 전쟁 중이던 베트남에 가서 항만하역 근로자로 3년간 일했다.

다시 돌아와 장사를 했지만 여의치 못했고, 제1차 중동 건설 붐이 일었던 48세에 다시 사우디아라비아로 가 7년간 역시 항만하역 근로자로 일했다. 이어 77세가 되기까지 20여 년간 외국어 번역회사에서 일본어 번역을 하면서 생활했다. 마치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을 떠올리게 하는 삶이다. 조 씨는 “어딘가에 갔더니, 팔십(八十)의 십자에 빗금을 하나 치니 팔천(八千)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80세를 살았으면 팔천 번의 우여곡절을 겪은 것이고, 90세를 살았으면 구천 번의 우여곡절을 겪은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자체가 축복이에요”라고 말했다.

은퇴 이후 본격적인 배움과 봉사의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도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고 호기심이 많아요. 젊어서도 호기심이 많았지만, 생활이 어렵다 보니 못 했는데, 나이 먹어서라도 해야지 마음 먹고 살았어요.” 그는 매일 6시에 일어나 9시 반까지 고양실버인력뱅크로 출근한다. 12시 반까지 3시간 봉사활동을 한다. 오후에도 이것저것 공부하거나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한 통역 재능기부를 하고 오후 6시에 집에 들어간다. 마치 직장생활을 하듯,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조 씨는 “오후에는 서울 시내로 들어가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영화인들을 만나요”라며 서두른다. 또 하나, 그는 배우이고 영화감독이다. 지난달 24∼27일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열린 서울노인복지센터 주최 ‘2018 서울노인영화제’에서 그의 다큐멘터리 ‘어르신 통역사들’이 상영됐다. 그 자신이 일본어 통역 재능기부를 하면서 같이 활동하는 노인분들의 이야기를 찍은 것이다. 앞서 2013년 고양영상미디어센터에서 영상제작 수업을 받은 그는 그해 제3회 스마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제작부문상을 받았다. 2016년 ‘오고가는 무슬림’이 노인영화제에서 상영됐고, 지난해에는 DMC단편영화제에 고양 대표로 나가기도 했다.

삶의 신조 같은 게 있을까. “밑바닥만 걸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높이 올라가지 못하고 아래만 보고 왔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 편하게 살아왔지 않았나 싶어요. 법정스님 ‘무소유’, 김수환 추기경의 ‘용서하라’는 말을 좋아해요. 근심 걱정 내려놓고, 자식 걱정하지 않고, 희망을 갖는 생활을 하며 긍정적이려고 노력합니다.”

건강 비결은 무엇일까. “먹고사는 데 전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젊어서도 운동한 적이 없어요. 계속 움직이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일까. 요새는 75세까지는 청년, 76∼80세는 중년, 81세부터 노년이라고 보아요. 대개 85세가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급격하게 쇠하는 고비인 것 같더군요. 그 시기를 잘 넘긴다면 100세까지 가는데, 그건 욕심이지요. 허허.”

또 하나의 비결은 가족인 것 같다. 부인(정민영·84)과 환갑을 바라보는 아들 셋을 두고 있는 조 씨는 “할머니가 요새 건강이 좀 불편하지만, 밥과 옷을 챙겨주고 집안도 챙겨주는 짝과 같이 해로한다는 자체가 행복하고 고맙다”고 했다. 조 씨는 “원로 희극인 송해 선생님이 나의 롤모델로, 그분처럼 건강하게 오래 활동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송해 선생은 조 씨보다 한 살 위로, 황해도 재령이 고향인 월남민이다.

요즘에 특히 젊은 세대 중에도 좌절을 겪고 삶을 포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조 씨는 “내 인생을 돌아보면, 모래 위의 인생, 모래 위에 지은 집 같았어요. 대홍수가 나서 숟가락 하나 건지지 못한 수재민이 여러 번 됐지요. 그런데, 나락에 빠져 죽을 거 같아도 반드시 다시 힘이 솟아나더군요. 젊은 분들이 용기를 잃지 말았으면…. 살아야죠. 어려움을 극복해야지요”라고 격려했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