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스벤 베커트 하버드대 교수가 쓴 ‘면화의 제국’은 자본주의가 공장이 아니라 목화밭에서 시작됐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 바탕에는 흑인 노예, 특히 여성과 어린이의 노동이 있었다. 사진은 19세기 미국 중남부 미시시피주에서 면화를 따는 흑인 여성 노예를 백인 농장주가 감시하는 모습. 자료사진

- 면화의 제국 / 스벤 베커트 지음, 김지혜 옮김 / 휴머니스트

유럽 제국주의 식민지 확장때
거대한 자본가·제조기업 등장

노예·임금노동의 폭발적 수요
대규모 프롤레타리아계급 생성

여성·어린 노동자 착취 시작
“‘전쟁 자본주의’라는게 적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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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노예 쿤타킨테의 이야기인 TV드라마 ‘뿌리’와 얼마 전 나온 영화 ‘노예 12년’ 등 대부분 흑인 노예의 역사를 다룬 영화에서 공간적 배경은 19세기 미국의 목화밭이다. 흑인 노예에 대한 수요는 거의 미국 면화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에 의해 발생했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뿐 아니고 인도 아(亞)대륙, 아프리카 등 식민지와 중국 등 전 세계적으로 목화밭이 널려있었다. 면화의 역사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11∼20세기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제조업의 자리를 차지했다. 1862년에 전 세계적으로 2000만 명, 전체 인구 65명당 1명꼴로 면화를 재배하거나 면직물 산업에 종사한 것으로 추산된다. 19세기 중반 면화는 대서양 세계의 번영에 핵심적인 요소였던 것이다. 전 세계 역직기의 3분의 2는 영국의 공장에 배치돼 있었고, 수출품의 50%가 면사와 면직물이었다. 영국 인구의 20∼25%가 면산업에 생계기반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 본토에서의 면화 재배는 거의 없었다. 영국 자산가들은 네트워크와 군사력, 자금력만으로 면화 생산과 유통 과정을 좌우했다.

이쯤 되면 면화가 산업혁명, 글로벌 자본주의의 형성·발전과 긴밀한 관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사와 자본주의 역사,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는 스벤 베커트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쓴 이 책은 오늘날의 글로벌화한 대량생산 형태의 자본주의가 1780년경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공장에서 출현했다기보다는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인 16세기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 아대륙, 중국 등 세계 곳곳의 들판, 목화밭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을 펼친다. 탄광이나 철도, 거대한 제철소 같은 산업자본주의를 확실히 보여주는 이미지들에 가려져 ‘면화’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면화의 제국’은 플랜테이션 농장과 공장, 노예와 임금노동자, 식민지와 피식민자, 철도와 증기선 등 요컨대 토지·노동·운송·제조·판매를 망라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들고 거기에 의존했다.

1000년이 넘는 면화의 역사 속에서 유럽은 그 중심에 있지 않았다. 유럽을 그 중심에 서게 한 힘은 강력한 국가를 앞세운 제국주의적 팽창, 식민지와 노예무역의 확장, 원주민 약탈이었다. 경작지와 공장이라는 두 단계의 노동집약적 생산 과정을 거치는 면화는 노예노동과 임금노동의 폭발적 수요를 불러일으켰고, 대규모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만들어냈다. 거대 제조기업을 등장시켰고, 세계 곳곳에 거대한 시장을 개척했다. 이 새로운 방식의 핵심에는 제국의 팽창과 원주민 약탈, 노예제, 무력을 동원한 교역, 자본과 노동력을 장악한 자본가가 있었다. 수많은 노예와 피식민자, 여성과 어린 노동자의 피와 눈물, 죽음을 바탕으로 형성된 이 같은 자본주의를 저자는 ‘전쟁자본주의(war capitalism)’라고 부른다. 흔히 역사가들이 이 시대를 ‘상업자본주의’라고 일컫지만, 자본주의 형성의 민낯과 폭력성을 드러내는 데 ‘전쟁자본주의’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고 본 것이다. 자본주의라고 하면 떠오르는 공장, 산업, 임금 등의 이미지는 모두 후대에 창조된 낭만적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또 산업자본주의를 남성이 주도한 것으로 기억하지만, 실제 면산업은 세계 여러 산업 가운데 유일하게 여성의 노동이 주도했다.

저자는 한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전 지구적 관점’에서 국가와 자본이 결합해 강화해온 글로벌화 과정의 역사를 펼쳐낸다. 그중에 한반도도 등장한다. 일본 제국주의는 대한제국 정부에 면화 생산 증대를 권고했고, 일본 방적업자들은 한국에 지점을 설립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흘러간 면화 양은 1904∼1908년에 연평균 1678만㎏이었으나,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이후 1916∼1920년에는 7484만㎏에 달했다. 일제는 인도 식민지와 아메리카 대륙에서 면화를 들여와 면화산업을 주도하는 영국에 좌우되지 않기 위해 면화의 안정적 공급에 크게 신경을 썼다.

흑인 민요 가수 레드베리가 만든 올드 팝송 ‘목화밭(Cotton Fields)’은 미국 루이지애나의 목화밭에 얽힌 추억을 낭만적으로 표현한다. 이 노래가 여러 가수를 통해 널리 불린 1960년대에는 이미 면화산업은 사양기에 접어들었고, 그리운 추억처럼 남았을지 모른다. 1963년 세계 면화산업을 100년 넘게 지배하던 영국의 리버풀면화협회가 문을 닫은 것은 그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저자는 “면화에 대한 유럽의 지배가 끝난 것을 보면 어떤 상태의 자본주의도 영속적이거나 안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며 “새로운 방식으로 여러 대륙을 연결한 면화는 근대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이자 불평등과 세계화의 오랜 역사,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본주의 정치경제를 파악하는 열쇠”라고 강조한다. 848쪽. 4만2000원.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