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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메르만 & 살로넨

작곡가와 연주자의 관계는 시나리오 작가와 배우, 그 이상으로 긴밀하다. 작곡가가 살아있다면 말이다. 오래된 편지를 읽듯 종이 위에 적힌 기호를 해석할 필요 없이 작품을 쓴 의도, 연주의 방향, 감정의 깊이까지 세심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86년 작곡가 레너드 번스타인의 교향곡 2번 ‘불안의 시대’를 번스타인의 지휘로 연주한 바 있는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연주를 오늘날 듣는다는 건 작곡가의 살아있는 목소리를 듣는 것과 다름없다. 지난 19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지메르만이 협연하고 에사 페카 살로넨이 지휘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연주(사진)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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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초연한 ‘불안의 시대’는 시인 W H 오든이 1940년대 미국에서 직접 겪은 노동의 현장을 토대로 쓴 시를 바탕으로 한다. 전쟁 중의 뉴욕을 배경으로 믿음의 상실과 그 믿음을 돌이키려는 절박한 노력을 담고 있다. 당시 오든을 만나 불안한 정서에 대해 공유한 번스타인은 그의 서사로부터 피아노 협주곡에 가까운 교향곡을 엮어냈다. 작곡가로서의 번스타인이 혁신자보다는 통합주의자에 가까웠던 만큼 20세기 음악 스타일, 예컨대 12음 기법부터 재즈까지 망라한 독특한 작법과 구성으로 이뤄져 있다.

지메르만은 치밀한 테크닉을 기반으로 변주마다 날 선 감각을 보여줬다. 그러나 결코 감정에 매몰되거나 격해지지 않았다. 무미건조하게 나열하거나 냉정하게 처리하는 방식도 아니었다. 한 음 한 음 음계를 짚어 내려오는 단순한 대목(7변주)에도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으며 무조의 선율 또한 그 형식미가 돋보일 만큼 뛰어난 집중력을 보였다. 지메르만은 이 작품에서 피아니스트를 ‘무심한’ ‘거리를 둔’ 존재로 설정한 번스타인의 의도를 완벽하게 드러냈다. 현대를 살아가는 관객을 결코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불안한 시대’를 매우 훌륭한 방식으로 펼쳐 보일 뿐이었다. 연주가 끝나면 청중은 그저 감흥을 지닌 채 다시 삭막한 풍경으로 걸어나갈 수밖에 없지만 이는 어쩌면 이 시대에 음악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15년 만에 한국을 찾은 지메르만은 뛰어난 통찰력과 타협하지 않는 진중한 표현력으로 오래 기억될 명장면을 선사했다.

2008∼2009시즌부터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이자 예술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핀란드 출신의 지휘자 살로넨은 혁신적인 작곡가인 만큼 현대음악 지휘에도 강점을 보인다. 번스타인의 ‘불안의 시대’를 비롯해 모리스 라벨의 ‘어미 거위 모음곡’, 벨러 버르토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등으로 구성된 이날 프로그램은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조차 다소 낯설었지만 살로넨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민첩하고 생동감 넘치는 연주를 보여줬다. 악장인 졸트 티하메르 비손타이를 비롯해 전 단원들의 뛰어난 기량은 자칫 산만하게 들리기 쉬운 버르토크의 작품에서도 조화를 잃지 않고 반짝반짝 빛났다. 객원으로 참여한 서울시향 타악기 수석 에드워드 최의 호연도 반가웠다. 앙코르로 전해준 시벨리우스의 ‘슬픈 왈츠’, 바그너의 ‘로엔그린’ 3막 전주곡까지 황홀한 밤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음악 칼럼니스트

사진=마스트미디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