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끝없는 항해’의 주인공인 선원은 클레멘타인호를 타고 평생 세계를 누빈 뒤,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온다. 보림 제공

추석 명절은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시간이다. 하지만 남보다 가족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할 때도 있다. 그럴 땐 오히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 같아 막막함을 느끼게 된다. 가족이 기다리는 집에 돌아온다고 해서 갑자기 나아지지는 않는다. 기다리는 사람이나 돌아온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함부로 말 한마디 얹는 것이 조심스러울 때에는 무조건 ‘가족의 이름’으로 부둥켜안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이럴 때 서로에게 다정한 마음의 선물로 건넬 수 있는 몇 권의 그림책을 권한다. 그림책은 아마도 당신을 대신해서 다독여주고 말을 걸어줄 것이다. 그림책은 ‘대안 가족’처럼 다가와 대화의 창을 열어준다. 또 ‘가족의 시간’에 시달린 나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선물해도 좋겠다. 가족에게, 또 자신에게 권하는 그림책 처방전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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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생명 맞아 함께 성장하는 고양이
- 육아에 지쳐 눈물날 때

아이를 키우기 힘든 사회에서 초보 양육자의 동굴을 통과하고 있는 가족이 있다면 엘리샤 쿠퍼의 그림책 ‘큰 고양이, 작은 고양이’(시공주니어)를 권한다.

이 그림책은 두 개의 빈 밥그릇과 소파에 던져진 작은 이불, 돌돌 말린 털실 뭉치로 시작한다. 내 한 몸 건사하기 어렵던 사람이 아이라는 작은 사람을 만나 그와 함께 살아가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다.

털실 뭉치를 굴리며 유유히 혼자 살고 있었던 큰 고양이는 작은 고양이를 맞이하게 되면서 완전히 다른 삶과 마주친다. 작은 고양이가 ‘언제 먹고, 언제 마시고, 언제 쉬는지’를 돌봐주다 보니 정작 자신은 어떻게 눈을 감고 뜨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작은 고양이는 큰 고양이가, 큰 고양이는 더 큰 고양이가 되어간다. 꿈틀거리는 간결한 흑백의 선은 백 마디 말로도 부족
한 육아의 어려움과 보람을 보여준다. 육아가 힘들 때 읽으면 눈물부터 펑펑 나는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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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러지기 일보직전 찾아와준 잠귀신
바쁜 삶 ‘위로 메시지’

공부에 지친 수험생, 취업 준비, 업무 스트레스로 불면에 시달리는 가족이 있다면 김지연의 그림책 ‘한밤중에 강남귀신’(모래알)을 건네주는 게 어떨까.

‘한번 놀면 밤이 새도록 놀고 한번 자면 한 오백 년 자는 잠귀신’인 노리가 뱅뱅 도는 경쟁적인 일과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자미를 만나 신나게 놀아주는 이야기다.

잠 한숨 편안히 못 자고, 눈코 뜰 새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잠귀신 노리는 세상의 불을 다 꺼주겠다고 말한다. 재미난 귀신 얘기를 들려주고 말랑말랑한 자장가를 불러주겠노라고 한다. 오늘 밤 제발 잠귀신 노리가 놀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위로의 그림책이다.

노리는 ‘자다가도 웃는 얼굴 웃다가도 자는 얼굴’이라고 자장자장 노래한다. 그러게 말이다. 잠든 얼굴이 사랑스러워서 몇 번이나 바라보는 것, 이것이 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 좋은 순간을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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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마다 안아주고 격려… 용기 불끈
‘좌절 청춘’에 주는 희망

도전이 뜻대로 잘 이뤄지지 않아서 마음이 많이 상한 가족이 있다면 이지은의 그림책 ‘빨간 열매’(사계절)를 슬쩍 건네주는 것도 좋겠다.

배고픈 아기곰은 나무 밑에 주저앉아 있다가 머리 위에 떨어진 빨간 열매를 줍는다. 그 열매를 더 구하기 위해서 나무를 타고 높이 올라간다. 하지만 아기곰을 기다리는 것은 빨간 벌집, 빨간 애벌레, 발그스름한 다람쥐다. 마침내 거대하고 붉은, 빨간 열매 같은 태양을 만나지만 손을 대려고 훌쩍 뛰어올랐다가 아래로 떨어진다.

아기곰의 낙하는 아쉽고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그러나 나무 아래에서 아기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푹신한 엄마곰, 아빠곰의 품이다. 가족이 당신의 좌절을 이해하고 있으며 언제든 당신을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서 제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결말이 고맙고 든든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노란 열매를 찾아 하늘을 바라보는 아기곰의 모습에서는 또 다른 희망이 보인다. 지난번에 붙잡지 못했던 목표가 무엇이든 앞으로도 새로운 길이 있을 테니 다시 시작하면 될 거라는 격려가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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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만장한 人生 저물 때… 옆에 있어줄 사람은?
은퇴 이후가 울적하다면

긴 인생 어려운 고비를 넘어 은퇴하고 허전한 이들에겐 명절은 쓸쓸한 시간이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는 부모님을 찾아 고향에 간다는데 평생 고생만 하다가 곁을 떠난 부모님을 둔 자녀라면 명절이 더욱 울적하다. 이럴 때는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그림책 ‘끝없는 항해’(보림)를 읽으며 마음을 달래보는 것도 좋겠다.

이 그림책은 1930년대 초에 만들어져서 50년 가까운 세월을 항해했던 상상의 배 ‘클레멘타인’에 관한 이야기다. 과일, 생선을 싣고 다니는 냉장선이었던 클레멘타인은 좌현에서 우현까지 12m가 넘는 큰 배였다.

클레멘타인호와 바다 생활을 시작한 젊은 선원은 시련을 이기며 뱃사람으로 경력을 쌓아가고 드디어 혼자 방향키를 잡는 일등 항해사가 된다. 클레멘타인호와 선원은 리스본, 보르도, 리버풀의 바다를 누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클레멘타인호의 운명은 의지와 달리 자꾸만 달라진다. 전쟁의 포격 속으로 끌려가 보급품을 실어 나르기도 하고 화산이 분출하는 뜨거운 섬나라로 일하러 가기도 한다.

어느덧 더 이상 운항할 수 없는 낡은 배가 돼버린 클레멘타인이 도착한 곳은 색색의 산호초가 있고 고래가 노니는 깊은 바다 밑이다. 클레멘타인과 일생을 함께했던 선원도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선원 부부가 바라보는 수평선에는 천천히 붉은 노을이 진다. 마지막 장면, 바닷속에 평온하게 잠든 배, 클레멘타인의 모습은 우리 윗세대의 파란만장한 얼굴을 닮았다. 사랑하는 이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는 기도 같은 결말이다.

그림책에는 시간을 되돌려주는 마법이 깃들어 있다. 그 시간 안에는 혼자만의 빛나는 순간도 있고 가족이 함께했던 그리운 어느 무렵도 있다. 우리가 그림책을 통해서 혹시라도 몇 마디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명절의 그림책 읽기는 충분히 의미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둘러앉을 가족의 선물을 준비하고 나눠 먹을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서 시장에 가는 것처럼, 함께할 이야기를 준비하기 위해서 가까운 작은 책방에 들러보는 것은 어떨까.

김지은 어린이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