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9일 비핵화와 미·북 대화,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 완화 조치 등에 대해 합의를 이룬 뒤 평양선언을 발표했다. 김 위원장은 조속한 시일 내에 서울을 답방(答訪)키로 했다. 일단 바람직한 일이다. 군사분야 합의서도 교환됐다. 하지만 핵심은 북핵 폐기를 위한 실질적 진전 여부다. 단순히 의지를 표명하고 선언하는 것은 이젠 의미가 없다. 김 위원장 육성 언급이 있었지만 마찬가지다. 국제사회가 북한으로부터 핵 리스트 신고·검증에 대한 조치를 받아내는 등 실효성 있는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면, 융숭한 방북단 대접도 한국과 세계를 상대로 치밀하게 연출된 북한의 선전선동 전술에 불과하다.

현란한 이벤트보다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경제 분야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방북한 기업인들을 둘러싸고 빚어진 일들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우선, 리룡남 북한 부총리와의 18일 회동에서 차례차례 자기 소개를 하고, 훈시를 듣는 듯한 모습이 빚어졌다. 그는 북한 국무위원회 위원이 아니며, 내각 부총리 9명 중 한 명으로 권력 서열 89위(2016년 제7차 당대회 기준)에 불과하다. 리룡남은 이재용 삼성 부회장에게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아주 유명한 인물이던데”라며 비꼬는 발언까지 했다. 글로벌 기업을 이끄는 한국 기업인들을 국가 원수급으로 예우하는 나라도 많다. 리룡남의 행태는 대한민국 재계에 대한 모욕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청와대 측이 부추긴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이다. 김현철 경제보좌관은 사회자 역할을 했다. 꼭 필요하다면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이 ‘좌장’ 역할을 했어야 했다. 격에도 급에도 맞지 않는 인사가 나선 것은 민간 홀대도 넘어 관존민비(官尊民卑) 행태로 비친다. 그러지 않아도 기업인들의 평양행은 ‘들러리’로 비치기에 충분했다. 정부는 북한 투자를 위한 탐색 차원이라고 둘러대지만, 기업이 훨씬 잘 알아서 대비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경제인은 내키지 않음에도 눈치 때문에 따라갔다고 한다. 급기야 북한 초청이냐, 청와대 단독 결정이냐를 놓고 한심한 진실 공방이 벌어졌다. 미국은 1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남·북·러 철도 연결 사업에 반대 입장을 선명히 밝히며 압박을 강조했다. 문 정부가 대북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기업인 팔목을 비튼다면, 정권도 기업도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