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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밀한 유혹

“라스베이거스에서 일어난 일은 라스베이거스에 남는다(What happens in Las Vegas, stays in Las Vegas)”라는 말이 있다. 도박과 향락이 존재 이유인 라스베이거스에서 일어난 일은 서로 묻지도, 말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에이드리언 라인 감독의 1993년 작 ‘은밀한 유혹’(사진)은 라스베이거스에서 한 부부와 억만장자가 맺은 은밀한 거래로 인해 일어나는 이야기를 그렸다.

다이애나(데미 무어)와 데이비드(우디 해럴슨)는 고등학생 때 만나 졸업하자마자 결혼한 젊은 부부다. 새집을 지으며 대출 등으로 빚에 허덕이는 것 말고는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완벽한 커플이다. 그러나 불경기로 인해 건축가였던 데이비드가 실직하고, 다이애나마저 일이 끊기면서 이들은 파산 직전에 이른다. 5만 달러를 갚지 못하면 집을 잃을 위기에 놓인 이들은 데이비드의 아버지에게 빌린 5000달러를 가지고 라스베이거스로 향한다. 짧은 시간에 돈을 열 배로 늘릴 방법은 도박뿐이라고 생각한 이들의 계획은 위험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가난하지만 젊고 아름다운 이 부부에게 라스베이거스는 엄청난 행운을 내려준다. 데이비드가 2만5000달러를 따 빚을 갚을 수 있는 목표액에 가까워진다. 이들은 침대에 돈을 뿌려놓고 환상적인 섹스를 한다.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 20달러짜리 지폐를 휘감은 남녀는 이날만큼은 서로가 아닌, 돈이 주는 엑스터시에 취하고 젖는다.

그러나 데이비드와 다이애나에게 찾아온 행운은 하루살이 수명이었다. 이들은 둘째 날 가진 돈을 모두 잃는다. 파산의 형벌을 마주하러 떠나려는 순간 이 부부를 지켜보던,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다이애나를 지켜보던 남자 존(로버트 레드퍼드)이 부부에게 접근한다. 존은 전날 쇼핑을 하다 마주친 후 한눈에 반해버린 다이애나와의 우연한 만남을 이길 게 뻔한 도박으로 전환한다. 부부를 파티에 초대해 호의를 베풀던 존은 친절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데이비드에게 “100만 달러에 다이애나와의 하룻밤을 허락해주지 않겠냐”고 묻는다. 부부는 돈으로 다이애나를 사려는 존을 비난하며 허둥지둥 존의 펜트하우스를 떠난다. 그러나 그날 밤 다이애나와 데이비드는 잠들지 못하고 뒤척인다. 코웃음 치며 거절했던 그 모욕적인 제안이 밤새 이들의 숨통을 누른다. 결국 다이애나와 데이비드는 존에게 간다. 존이 준비해 놓은 멋진 드레스와 신발을 신고 정박해 놓은 그의 배 위에서 다이애나는 100만 달러가 걸려 있는 섹스에 응한다.

뛰어난 스타일리스트인 라인 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명장면을 빚어냈다. 밤하늘 아래 갑판에서 다이애나를 기다리고 있던 존이 떨고 있는 다이애나의 드레스 단추를 채워주는 장면은 영화에 등장하는 수차례의 정사신보다도 로맨틱하고 자극적이다. 경멸과 저주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던 다이애나의 볼과 입술이 설렘으로 떨리는 순간이다. 젊은 여자를 돈으로 사보겠다는 추악한 중년의 부호가 아닌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이 반한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은 한 남자의 순정과 열정이 절절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룻밤의 거래는 존과 다이애나, 데이비드에게 지옥 같은 여운을 남긴다. 존은 다이애나를 향한 그리움과 집착으로, 다이애나는 저항할 수 없는 이끌림으로, 데이비드는 질투와 분노, 자괴감으로 괴로워한다. 다이애나는 존의 끊임없는 구애에 갈등하지만 결국 데이비드와의 사랑을 택한다.

영화를 보며 눈을 뗄 수 없는 요소는 당시 ‘사랑과 영혼’ 이후 벼락스타가 된 데미 무어의 청초한 외모와 풍만한 몸이 아닌,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로버트 레드퍼드의 멋진 모습이다. 호색한으로 보일 수 있는 존 캐릭터가 세월의 흔적에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레드퍼드에 의해 표현되며 음탕하거나 추잡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이애나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여자의 반응을 살피는 그의 표정에는 소년 같은 흥분과 노년의 두려움이 공존한다. 부드럽게 응시하면서도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을 것 같은 레드퍼드의 힘 있는 눈빛은 전성기 모습보다 더 유혹적이다. 존의 ‘음란한 제안(Indecent Proposal·영화의 원제)’은 그렇기에 거부 불가하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