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기계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첫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는 막연한 두려움을 버리고 인간을 위한 인간과 기계의 협력을 이뤄내야 한다고 했다. 작은 사진은 1997년 IBM 슈퍼 컴퓨터 딥블루와 맞붙은 카스파로프. 자료 사진

- 딥 씽킹 / 가리 카스파로프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슈퍼컴퓨터 딥블루에 패배한
체스 세계챔피언 카스파로프

“기계는 인류를 위협하지 않아
AI 진화하면 삶 풍부해질수도”

인공지능과의 대결 회고하며
신기술 미래 대한 낙관론 펼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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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전직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54)는 20대에 이미 세계를 제패한 체스계의 ‘그랜드마스터’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거둔 숱한 승리가 아니라 단 한 번의 패배로 기억된다. 그가 이룬 많은 승리를 넘어서는 역사적 패배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스파로프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도 1997년 체스 세계 챔피언이 IBM 슈퍼 컴퓨터 ‘딥블루’와 ‘인간 대 기계’ 대결을 벌여 패배한 사건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에겐 뼈아픈 이 패배가 과학과 기술의 역사에서는 인공지능(AI) 시대의 개막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그는 이때 이미 2011년 IBM의 AI 왓슨이 미국 퀴즈쇼 제퍼디에서 74회 연속 우승을 하거나 2016년 구글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꺾는 사건이 예고됐다고 했다.

‘딥 씽킹’은 카스파로프가 역사적 패배 이후 20년 만에 그날의 경기를 자세히 돌아본 책이다. 20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패배는 전직 챔피언에게 여전히 쓰리고 아픈 듯하다. 그는 1996년 딥블루와 벌인 1차전 여섯 게임, 1년 뒤 1997년의 재대결에서 벌인 여섯 게임 등 12게임을 꼼꼼히 기억하며 어떤 실수를 했는지, 육체적·정신적으로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낱낱이 전한다. IBM이 마지막 게임에서 속임수를 썼다고 폭로하기도 한다.

기계에 패한 첫 챔피언으로 기록됐지만 카스파로프는 컴퓨터와 기술에 매우 개방적인 선수였다. 1985년 스물두 살에 처음으로 체스 기계(컴퓨터)와 시합을 벌인 뒤 그는 새 체스 기계가 나올 때마다 게임을 벌였다. 승리한 딥블루와의 1차전까지 전승을 거뒀다.

딥블루 2차전을 앞두고 그는 자신만만했다. 기계가 빠르게 발전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직은 챔피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기를 시작하자 그는 자신이 오만했음을 깨달았다. 그날의 기억 중 하나다. “컴퓨터는 상황이 유리하다고 우쭐대지도, 혹은 불리하다고 실망하지도 않는다. 게임을 치르는 여섯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시계 초침 소리에 신경 쓰지도 않으며, 허기지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일도 없다. 게다가 화장실에 갈 필요도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상대가 기계라고 생각할 때, 신경 시스템을 탄력적으로 조율하기가 더 힘들어진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책은 단순히 패배함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긴 챔피언의 개인 회고록이 아니다. 그는 고통스러운 체험을 중심에 두지만 매우 이성적으로 과학과 기술, 특히 체스 기계의 발달과 ‘인간 대 기계’ 대결의 역사를 광범위하게 살핀 뒤 미래를 예견한다. 1953년 과학자 앨런 튜링이 처음으로 체스 기계 알고리즘을 만든 뒤 ‘지성의 시금석’인 체스를 두는 기계를 만든다면 인간 지성의 비밀을 푸는 것이라며 과학자, 정부, 개발자가 뛰어들어 이끌어온 체스 기계의 역사는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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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카스파로프는 AI로 대표되는 기술의 미래에 대해 낙관론을 펼친다. AI가 인간의 지능을 넘어 인간을 쓸모 없게 만들 것이라는, 광범위하게 유포된 기술 비관론은 거부한다.

그는 이 같은 우려와 비관을 신기술에 대한 회의주의로 봤다. 어느 시대나 새로운 기술에 대한 두려움, 경계, 회의주의가 있지만 이 기술이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나면 회의주의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AI로 인해 인간은 더욱 인간적인 활동에 집중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AI가 진화를 거듭하고 까다로운 정신노동을 대체하면서 우리는 창조와 호기심,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추구하게 되었다. 지혜롭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기술은 우리의 삶을 더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요즘 AI와 과학기술을 두고 과학자, 철학자, 미래학자 및 현장 기술자 등 광범위한 전문가들이 벌이고 있는 AI와 인간에 대한 논의, 기술의 미래 전망에서 매우 독특하고 의미 있는 자리를 갖는다. 살펴본 그의 주장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기계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전직 체스 챔피언이라는 이력 때문이다. 그는 기계와 인간의 대결을 경험했고, 패배했고, 패배한 다음까지 지켜본 ‘유경험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계가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2003년 프로 체스계에서 은퇴하고 2008년 러시아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딥블루에 패배한 이후 기술 문제를 꾸준히 연구해왔다. 2013년 슈퍼 인텔리전스 분야의 최고 학자 닉 보스트롬이 이끄는 옥스퍼드 마틴스쿨에 객원 연구자로 초청되기도 했다. 다양한 학문을 가로지르며 AI를 연구하는 ‘인류 미래 연구소’(Future of Humanity)인데, 그는 유일하게 박사학위가 없는 연구원이다. 그가 왜 초대됐겠는가.

물론 그도 기술발달의 위험성을 인정한다. 기술 발달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자신이 졌을 때 체스 게임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체스는 변함없이 계속됐다. 오히려 그 뒤 체스 선수들은 누구나 체스 데이터베이스를 적극 이용하며 인간의 약점을 커버했고 체스 컴퓨터와 인간이 팀을 이루는 ‘어드밴스드 체스(Advanced Chess)’가 등장하기도 했다. 인간과 기계는 대결이 아니라 인간이 중심이 돼 협력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도구를 만드는’ 인간은 미래에도 AI를 확장된 외장 하드로 써야 한다며 이를 위해 인간은 기계가 할 수 없는 더 깊은 ‘딥 씽킹’을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우리의 과제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두와 대결을 벌이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기계에 특정 과제를 가르치는 데 능하다. 앞으로 더 많은 과제를 기계에 맡길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새로운 과제와 사명, 산업을 창조하는 것이다. 용감한 탐험가가 필요하다.” 428쪽, 1만6000원.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