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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 화가, 서울대 교수

기억이 없는 따뜻한 곳, 시간이 멈춘 섬, 시와타네호. 멕시코인들이 망향가처럼 부른다는 신비의 섬 이름이다.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마다 시와타네호, 시와타네호, 주문처럼 외우며 꿈과 희망의 증거로 삼으려 한다는 곳이다. 시와타네호만큼은 아니지만, 내게도 가끔 떠올려 보는 지명이 있다. ‘함파우’, ‘물결이 고요히 머무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참 예쁜 우리말이다. 어릴 적 나는 읍내에 나왔다가 어머니 손을 잡고 ‘함파우 고개’를 넘어 송동 옛집으로 가곤 했다. 가파른 그 고갯길을 어머니는 먼저 가서 기다리시며 어서 오라고 채근하시곤 했지만, 지천으로 피어 있는 황홀한 꽃들에 시선을 뺏긴 나는 매양 걸음이 더디어지곤 했다.

그 지점으로부터 세월은 참 많이도 흘러, 육칠 년 전부터 내 고향 남원시는 그 울울창창하던 함파우 계곡에 새로운 아트밸리 계획을 세워 추진 중이다. 급하지 않은 물길이 고요히 산자락을 감아 도는 그곳이 ‘춘향’ 이후 새로운 문화 공간의 대안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몇 년 전, 새로 부임했다며 남원의 젊은 시장이 5∼6명의 간부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함파우 아트밸리와 예촌이라는 이름의 한옥촌을 구상 중이라고 했다. 아울러 전임 시장으로부터 인계받은 사안이라며 내 이름의 미술관이며 작품 기증 얘기도 꺼냈다. 그 전임 시장이라는 분이 선거에 출마하면서 방송에 나와 나에게 미술품을 기증받아 미술관을 세우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전해 들었다. 그분이 구상했다는 미술관의 후보지는 현재의 춘향문화테마파크 내의 한 한옥형 모텔 아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잊고 있던 그 미술관 이야기를 신임 시장이 다시 꺼낸 것이다. 사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이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2002년도였지만, 나는 그때 그럴 여건이 아니라며 완강하고 정중하게 사양한 바 있다. 어쨌거나 그날 나는 신임 시장에게 함파우는 개발하지 말고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으며, 한옥촌 구상은 철회하는 것이 좋겠다는 부정적 의견을 내놓았다. 어쩌면 함파우가 내 마음의 ‘시와타네호’로 남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에 시작된 문화축제 ‘춘향제’는 한때 전국적 명성을 지닌 대표축제였다. 하지만 새로운 콘텐츠와 아이템 개발이 부진하면서 노쇠와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시장이 이런 얘기를 꺼냈다. 교수님은 남원에 대해 얼마만큼이나 알고 계십니까? 이 돌발적인 질문에 나는 면접관 앞에 선 학생처럼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남원은 옛날 교수님이 살던 인구 십사만대의 그 남원이 아닙니다. 인구는 반 토막이 났고 도시는 가라앉아 있습니다. 수학 여행 온 학생들은 광한루에 우르르 내려 휙 둘러보고는 화장실만 이용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버립니다. 그렇다고 이 전통 깊은 문화도시에 마구 공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남원이 새로운 거점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화적 동력이 필요합니다.

말미에 그가 말했다. 남원에서 한옥촌이 안 되리라고 보는 것은 혹시 전주 한옥마을을 의식해서는 아닙니까? 나는 속으로 찔끔했다. 우리는 남원의 한옥촌을 한옥마을과 차별화할 작정입니다. 오히려 남원 ‘예촌’은 전주 한옥마을로 인해 시너지를 일으킬 것입니다. 미술 쪽이나 좀 연구해 주십시오. 이환주 남원 시장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끝나 버렸다. 그런데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니 지역의 각종 매체에는 이백억 원 가까운 돈을 쏟아부은 남원의 소형 한옥마을 ‘예촌’에 대한 비난이 봇물을 이루고 있었다. 같은 전라북도인 전주에 한옥마을이 있는데, 누가 그보다 먼 남원 한옥촌에서 자고 가겠느냐는 것이었다. 내 생각과 비슷했다.

그런데 그 ‘예촌’이 문을 열고 보니 상황이 딴판이었다. ‘예촌’이 대박을 치고 있다는 소문이 났을 뿐 아니라, 나의 고향 집이 있는 ‘예촌’ 가까운 동네까지 환골탈태, 훤해졌다는 것이다. 비로소 전주 한옥마을과 차별화하여 성공시키겠다던 젊은 시장의 말이 떠올랐다. ‘춘향제’ 또한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있었다. 전국 축제 1위에 국가 지원금도 받았다는 소문이 들렸다. 재작년 ‘춘향제’에 내려가서는 속으로 그럴 만하구나 싶었다. 세계적 축제인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견줄 만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판소리 일색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록그룹에 성악가들이며 해외 저명 연주자들까지 대거 초청돼 아연 활기를 띠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별로 말이 없던 젊은 시장의 얼굴이 스쳐 갔다.

공장을 세우기는 쉽다. 그러나 문화를 일으켜 세우기는 어렵다. 흔히 문화를 ‘굴뚝 없는 산업’이라고들 하지만, 그 산업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 대신 한번 타오르면 쉽게 꺼지지 않는다. 남원. 그곳을 생각하면 천 가지 상념과 만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역 앞의 ‘복지다방’이라는 곳에서 생애 첫 미술 전시회를 열었다. 코스타리카에 이민 가 있는 서라벌예대 출신 ‘중근이형’과 함께였다. 송동초등학교에 다닐 때 부임해 오신 ‘정문자 선생님’은 나를 보면, 너는 커서 꼭 화가가 되어야 한다며 격려와 당부를 하시곤 했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라고 했던 것처럼, 어쩌면 나를 키운 것 역시 그 칠 할쯤은 고향의 바람과 햇빛 그리고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싶다. 내 마음의 시와타네호, 함파우. 그 ‘물결이 머무는 고요한 곳’은 어느새 시간과 추억 속의 몽롱한 곳이 아니라, 현실의 지평이 되어 성큼 내 앞에 다가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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