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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 화가, 서울대 교수

“누군가에게서 받은 편지를 죽을 때까지 보관한다는 것은 그 친구에 대한 우정을 보관하는 행위이다. 더구나 당사자가 문인일 때 그 편지들은 문단사적 의의를 지닌다. 한 시대의 증언이면서 표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영태의 편지들’(6.16∼7.12, 영인문학관) 전시를 기획한 영인문학관 강인숙 관장의 말이다. 한 원로 문인이 김영태 시인을 가리켜 “보일락 말락 한 분”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썼다고 하는데, 김 시인을 아는 분들은 그 표현이 참 절묘하게 맞는다고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김 시인은 내게도 그런 분이셨다. 시인을 처음 뵌 것은 내가 연극에 빠져 돌아다니던 1970년대 후반 무렵이었는데, 서울 용산의 한 뒷골목에 있던 민중소극장에서였다.

나의 희곡 작품 ‘십자가 내려지다’의 공연장을 찾아오셨던 것이다. 연극이 끝나고 뒤풀이들을 가는데 선생께서는 한사코 사양하셨다. 그때가 늦은 가을이었는데, 머플러며 코트를 멋지게 차려입으신 모습이 생생하다. 함께 가시자고 인사를 드렸더니 “미대생이지? 나도 홍대 미대 나왔어요” 하시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인사를 나누고 홀로 멀어지는 시인의 뒷모습이 유난히 쓸쓸해 보인다는 느낌을 가졌던 것 같다.

그 김 시인께서 어느 날 예술의 전당 국악당이라며 전화를 하셨다. 국악당 벽에 걸려 있는 나의 커다란 작품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시가 몇 줄 떠올라 즉흥적으로 한 편의 시를 쓰게 됐다고 하시면서 제목이 ‘모자를 쓴 방울새’라고 하셨다. 그런데 며칠 후 원고지에 육필로 쓴 ‘모자를 쓴 방울새’가 배달돼 왔다. 그 귀한 시고를 내 딴엔 단단히 잘 둔답시고 소설가 이청준, 최명희 선생께서 보내주셨던 엽서며 편지들과 함께 어딘가에 깊이 두었는데, 이번 전시 팸플릿을 받고 부랴부랴 거의 한나절을 찾았는데도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다.

동서를 막론하고 예술가의 편지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귀한 예술품이자 생애의 기록이 된다. 이번 ‘김영태의 편지들’ 역시 이미 고인이 된 시인의 삶과 체취와 동선을 마치 플래시백 기법의 영화처럼 고스란히 되살려 놓고 있다. 특히나 감동적인 것은 고인이 생애의 마지막 시간들을 지인들과 나눈 다양한 사연의 편지들을 직접 챙겨 세상을 떠나기 직전 한 문학관에 기증했다는 점이다. 주고받은 편지들을 정리하면서 시인은 삶의 온갖 추억과 인연들을 떠올리며 행복해하지 않았을까 싶다.

김 시인의 마지막 연락을 받은 것은 한 지인을 통해서였다. 시인께서 김 화백의 손맛이 나는 캐리커처 한 점을 받았으면 한다는 사연이었다. 그 전화에 좀 당황스러웠던 것이, 선생과는 거의 십 년에 한 번꼴로 연락을 주고받을 만큼의, 그야말로 ‘보일락 말락’한 사이여서 캐리커처를 그려드릴 만큼 친숙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내가 좀 난색을 표했는데, 며칠 뒤 그 지인으로부터 다시 간곡한 청이 들어왔다. 까닭은 모르겠는데 선생께서 꼭 김 화백의 캐리커처 한 점을 받고 싶어 한다는 것과 함께, 사실은 좀 심각한 병중이시라는 전갈이었다. 그래서 며칠 뜸을 들였는데도 영 자신이 없었다.

김영태 시인께서는 시인이기 전에 화가이셨고, 특히 문인이나 무용가·음악가·화가들의 캐리커처를 많이 그리신 분으로 유명하다. 까슬하게 바스러질 듯 이어지는 그 캐리커처들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선을 몇 번 안 움직이면서도 외형적 특징은 물론 내면적 분위기까지 이끌어내는 그 솜씨에 나는 늘 탄복하곤 했다. 그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어른께 내가 그린 서툰 ‘시인의 얼굴’ 그림이 전해진다면 실망하시지 않을까 생각하며 붓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 며칠 후 운명하셨다는 전화가 왔다.

캐리커처 한 점 받고 싶다는 그 모처럼의 마지막 청마저도 들어드리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까지도 가슴이 저릿하다.

이번 ‘김영태의 편지들’ 속에서는 생전의 ‘절친’이었던 마종기 시인과 나누었던 글들에 눈길이 갔다. 마 시인의 ‘김영태의 기차역’이라는 글에서는 시인을 ‘눈 감고 걸어간 몽상의 나그네’라고 칭했다. 이런 대목도 나온다. 시와 무용과 그림과 음악, 연극 안에서 푸푸 허우적대다가 익사한 어부라고. 이 이상 어떻게 더 시인을 콕 집어 그려낼 수 있을까 싶은 절묘한 표현들이다. 유난히 내 가슴을 후벼 파는 내용도 있다.

‘바람 사이에 노래, 꽃 사이에 노을, 네가 죽었다면 나도 그 근처…….’

참으로 내가 아는 김 시인은 바람 사이의 노래, 꽃 사이의 노을처럼 평생을 아름다움에 취한 탐미주의자로 살다 가신 분이다. 절친한 시인 친구를 먼저 보내며 ‘네가 죽었다면 나도 그 근처’라고 썼던 글에서는 둘 사이의 우정이 죽음을 넘어서까지 이어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기까지 했다.

문득, 얼마 전 그야말로 ‘바람 사이의 노래, 꽃 사이의 노을’처럼 살다가 홀연히 내 곁을 떠나간 한 사람을 그리며, 나는 그녀가 남겨준 사백여 통의 손편지를 새삼 ‘이슬이 아직 묻어 있는 꽃다발처럼’ 바라보게 된다. 외로움에 사무치는 밤이면 그야말로 그녀가 쓴 ‘글자들이 툭툭 튀어나와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전자메일함을 열면 쏟아져 나오는 온갖 문자와 사연들 속에서 정작 우리가 잃어버린 손편지들. 꾹꾹 눌러쓴 그 글들 속에 담긴 숨소리며 정 깊은 체취들을 ‘김영태의 편지들’은 고스란히 살려내고 있다. 모처럼 눈으로보다 마음으로 먼저 다가오는 참 고마운 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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