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발견 / 시어도어 젤딘 지음, 문희경 옮김 /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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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위대한 사상가로 불리는 영국 역사학자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은 이즈음에 필요한 책이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로 건너가는 ‘분절의 시기’엔 매일의 일들에 바빠 옆으로 제쳐둔 근본적인 질문들이 불쑥불쑥 떠올라 마음을 흔들기 때문이다. 온전한 삶은 무엇이고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인가, 지난 한 해 나는 잘 살아왔나 같은 질문들이다.

역사학책이고 고급스러운 산문이며, 각 문제에 대한 최첨단 논의를 전하는 날카로운 인문 철학서인 동시에 슬쩍 자기계발서 면모까지 갖춘 책은 헛된 삶이란 무엇인가, 나에 관한 환상을 버릴 수 있는가, 솔메이트의 부재를 무엇이 대체할 수 있을까 같은 28개의 질문을 통해 삶의 근본에 접근해 간다. 젤딘이 답에 육박해 들어가는 방식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역사학자의 일반적인 연대기적 서술 방법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거대한 모자이크를 완성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를 세계적 역사가로 만든 ‘인간의 내밀한 역사’의 경우도 여성 28명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고독, 사랑, 공포, 호기심, 연민, 가족 문제를 다룬다. 이 때문에 그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통해 프랑스 사회를 그려낸 발자크에 비유되며 ‘역사학계의 발자크’로 불리기도 한다.

이 책에서도 그는 고대 그리스, 중국, 일본, 아랍 세계부터 오늘에 이르는 수천 년 동안의 철학자, 문인, 예술가, 모험가, 정치인과 군인, 기업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생을 허비했다는 공허감에 빠졌던 중국 명나라 문인 모기령, 선전용 영화를 만들라는 압박에 세상과 불화했던 예이젠시테인, 아인슈타인, 도스토옙스키, 카네기, 이케아 창립자 잉바르 캄프라드, 밥 딜런, 그리고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19세기 이란 여행자까지 동서고금의 숱한 인물들, 족히 수백 명이 등장한다. 이 같은 방식에 대해 그는 “한 사람의 경험, 한 시대의 지식만으로는 인생이 가진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기때문”이라고 했다. “한 개인의 기억은 조악하고 한계가 있기에 기억의 창고를 가능한 한 넓혀야 한다”는 그는 “다른 시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삶과 고민을 통해 답에 이를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그는 인물을 단정적으로 해설하기보다는 그 인물이 직접 쓴 자서전이나 발언을 그대로 전하며 각 주제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업은 사람들의 직접 증언들을 기록해 중요한 사건이나 시대의 모습이 드러나게 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독특한 장르인 ‘목소리 소설(Novels of Voices)’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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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풀려 나오는 28개 질문은 개인의 삶, 자아, 일, 나이 듦, 관계, 사랑, 예술, 국가, 종교, 행복 등 현대인들이 마주한 다양한 문제를 광범위하게 통과해 나가는데 여든셋의 역사학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리 멋지지 않다. 전문화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은 점점 더 촘촘히 가로막히고, SNS 덕분에 오히려 진정한 관심사를 타인과 나눌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종교나 국적이 다른 사람들, 여성과 남성 사이의 장벽은 여전히 견고하다. 다들 자아실현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지만 자아실현이 성공과 동의어로 간주되면서 충만한 삶과는 멀어졌다. 또 누구나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행복한 사람이 이기적일 수 있고, 부유해진다고 저절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자유를 얻었지만 자유를 어떻게 누릴지 모르고, 권력은 부패할 뿐 아니라 과대망상을 퍼뜨리는 바이러스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복지를 개선하기 위한 공공의 처방은 안타깝게도 원하던 결과를 얻은 예는 극히 드물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비관주의자가 아니다. “세상이 무섭고 혐오스럽고 비극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름답다”는 것이다. “각자가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세상을 조금이라도 덜 혐오스럽게 만들고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다”고도 했다. 이 책은 바로 이를 위한 작업이다.

책의 원제는 삶의 숨겨진 기쁨(The Hidden Pleasures of Life). 결국 28개의 주제를 돌아 그가 말하는 온전한 삶, 가치 있는 삶, 삶의 숨겨진 기쁨에 이르는 방법은 ‘타인’이다. 타인의 발견, 타인에 대한 경청, 타인과의 대화, 타인과의 사랑이다. 사랑의 반경이 점점 넓어지면 더 의미 있게 살 수 있다고 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심장이 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심장은 어떻게 뛰고 다른 정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채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삶을 공격하는 치명적인 질병을 ‘생전 경직’으로 표현했다. 호기심을 태워버리고 반복적이고 무감각한 일상에 안주하는 정신의 경직. “이런 상태는 살아 있다는 착각을 주기에 사후 경직보다 더 위험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타인과의 대화를 세포에 비유해 이렇게 설명한다. “육체의 생존은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의 대화에 의존한다. 세포는 주변의 다른 세포들과 연결되면서 계속 살아있다. 매일 내 몸에서 죽어가는 수십억 개의 세포들 대다수는 자살한다. 주변의 다른 세포들과 신호를 주고받지 못할 때 자살 기능을 발동시킨다. 그리고 다른 세포들과 결합해서 자기보다 더 큰 무언가를 만들 때 살아남는다. 주변 세포들과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하면 침묵에 대한 벌로 죽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이야말로 역사 속 숱한 사람들이 침묵을 넘어 나누는 거대한 대화이다. 그래서 매우 느리게 읽어야 한다. 읽다가 멈추고 다시 읽고 책 속 사람들의 고민과 이야기를 경청하고, 대화하며 그렇게 자신의 답을 찾아가야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